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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연한 출발 Oct 01. 2022

물방울 작가 故김창열 화백의 고백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2022 리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닌 게 되고, 물은 물이 아닌 게 된다. 

산은 다시 산이 되고, 물은 물이 된다. 


깨우침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진다. 김창열 화백의 둘째 아들 김오안 씨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사라진 시대의 이미지와 말을 찾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아버지 인생을 다룬 영화의 첫 장면은 무엇이었으면 좋겠어요?"
"아기"
"두 번째 장면은요?"
"흰 눈. 한 남자가 상자를 들고 와. 그 상자에는 비밀이 담겨 있지."


 감독은 아버지를 산타클로스가 아닌 스핑크스 같다고 말한다. 여행자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이집트의 괴물이자 태양신의 상징인 스핑크스. 감독(김오안)의 어머니는 침대 머리맡에서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셨지만 아버지(김창열 화백)는 달마 대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달마 대사는 흰 벽을 바라보며 앉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눈꺼풀까지 잘라내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9년의 시간이 흐르고 달마 대사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

 감독이 아버지에게 깨달음의 본질을 묻자 김창열 화백은 답한다.

"모든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와 환상의 개념이 사라지고 가벼움만 남는단다." 

감독에게 가장 두려웠던 건 아버지의 침묵이었다. 비밀이 담긴 상자를 든 남자, 스핑크스, 9년 동안 명상 수행을 했던 달마 대사 그리고 침묵. 이것이 김창열 화백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그의 달마 대사에 대한 이야기는 말뿐인 빈 수레가 아니었다. 김창열 화백은 1971년 물방울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오직 물방울만 그렸다. 2021년 죽기 전까지 약 50년의 세월을 물방울만 그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은 이런 종류의 예속을 어떻게 가실 수 있는가 질문한다. 마지 수행을 위한 인내심과 끈기와 절제의 연속이었다. 그는 생전에 도덕경의 경구를 적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추상적이면서도 내밀하다는 것이었다. 감독이 바라보는 아버지는 모든 것에 다 관심이 있지만, 어느 것에도 열정은 없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감독에게 끈기가 없다며 항상 나무랐다. 그를 침묵하게 하고, 매사 진지하게 만들었으며, 물방울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과거는 무엇일까.

"아버지 인생에 힘든 순간들을 알고 싶어요"
"(한숨)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는 데 사람 머리가 바람 빠진 럭비공처럼 굴러다녔어. 수백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1929년 생인 김창열 화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45년 일본이 35년 동안의 식민지 통치를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6.25 전쟁이 터졌다. "우린 떠났어. 밤엔 걷고, 낮엔 자고" 북한 맹산이 고향인 그는 수업 시간에 낙서처럼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적자 끌려갔다. 그는 탈북을 위해 도망쳤으며 3.8선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북한이 싫어 도망쳤지만 곧 전쟁이 일어나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죽음이 어디에나 있었어. 젊은이들의 죽음이. 내 앞의 남자가 폭탄에 작살이 났어. 내 앞에서. 그리고 난 살았지. 그 당시에 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지."

 그는 60년대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고통주의적 그의 예술은 뉴욕에서 자리가 없었다. 뉴욕은 당시 팝 아트의 성지였으며 소비주의적 도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부서졌다. 뉴욕이라는 도시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많이 지쳤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야 했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마흔 살에 혼자 돈 한 푼 없고 예술적으로도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물방울을 만난다. 42세, 고요한 화실 속에서. 

"내가 파리에 정착한 첫 해에 매우 외로웠어. 불안에 잠겨 있던 어느 날, 그림을 뒤집고 물을 뿌렸는데 빛이 나고 그림이 됐지. 이게 내가 할 일이다. 깨달았지."

그의 아내는 그가 가진 것은 죄책감이었어고 살아있다는 특권을 가졌으니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됐다고 말한다. 


 감독은 아버지가 그린 물방울들을 눈물이라고도 봤다. 아버지는 숨겨진 감상주의자였다. 다른 화가의 그림 속 인물의 눈물에는 그 근원이 그림 속에 같이 있었다. 하지만 김창열 화백의 그림에서는 눈물의 근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추상적인 슬픔일 뿐이다. 젊은 시절 그의 친구들이 옆에서 모두 피 흘려 죽어갈 때 그는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전쟁의 외상을 짊어졌다. 전쟁에서 그가 본 무수한 피를, 원천인 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물방울은 눈물이자, 죽어간 전우들의 피였다.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잊기 위해, 불안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내게 그림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김창열 화백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화백은 "내 불행은 여기서 시작됐지. 할아버지가 엄청 칭찬을 많이 해 주셨어. 어떻게 그렇게 잘 쓰냐고. 내 병적인 창조력이 간질거리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어"라고 말한다. 


 그가 죽기 전 가장 후회하는 일은 어쩌면 너무 진지했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김창열 화백은 아들에게 매사에 진지하지 않다고 나무랐지만 그는 아들의 그런 성향을 흡족해했다. 


"나는 호랑이 꼬리를 잡은 사람처럼 평생을 진지하게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한시라도 호랑이 꼬리를 놓치게 된다면 잡아먹히니까요. 보아라 바로 이것이, 부질없이 복잡한 나의 삶이다."


 이젠 그의 물방울은 예전의 물방울이 아닌 게 됐다. 거대한 벽 같은 캔버스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 굳게 다문 입, 내면으로 소용돌이치는 그의 눈빛이 한 예술가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감독은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던 것 같다고 말한다. 틈, 기묘함, 균열. 자식이 아닌 한 예술가와 예술가 사이, 아버지와 세상 사이, 아버지와 그의 내면 사이 또한 모두 틈과 균열, 기묘함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김창열 화백은 아들 김오안 씨가 촬영하는 카메라 안에서도 그가 세상에 보이는 거리감을 그대로 유지했다. 관객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한 개인으로서 김창열 화백의 모습을 볼 순 없지만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신비함을 그대로 전달받는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삶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이젠 그의 물방울에서 눈물이 보이고, 피가 보이고, 한국사가 보이고, 한 개인의 고통과 시간들이 보인다. 


장르: 다큐멘터리/ 대한민국/ 79분
개봉: 2022.09.28
감독:김오안
주연: 김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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