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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Oct 12. 2022

내 이름이 뭐더라



나는 자유로운 20대를 보냈다. 하고 싶은 건 다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해외 교환학생도 가고 6개월 간 실크로드를 따라 유라시아를 떠돌아다니며 봉사자로 일을 하기도 하고 배낭여행을 하기도 했다. 미군 부대에서 인턴을 하기도 하고,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원을 마친 후 꿈의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으쌰 으쌰 일하면서 얻는 즐거움, 삶의 보람을 느끼던 차에 아이가 생겼다. 기다리던 아이였다. 그렇게 첫 아이를 낳고 1년 간 육아휴직을 했다. 


아이를 낳자 내 이름 석자는 '엄마'로 갈음되었다. 어린이집에 가면 '누구 어머님'으로 불렸고 아이 어린이집 같은 반 아이 엄마들에게는 '누구 엄마'로 불렸다. 어린이집 앞 놀이터에서 놀다가 안면이 있는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내게도 그들에게도 서로 '누구의 엄마'일뿐.  


내 이름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내 시간, 내 자유와 함께. 


그러다 남편의 직장과 함께 미국에 왔다. 


남편이 한창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동안, 나는 아이와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미국에서는 적어도 "누구 엄마"라고 나를 부르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 꽤 오랜 시간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미국에 오니 난 그저 영어가 어눌한 외국인 아줌마일 뿐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영어 시험을 치르고 지원서를 준비하고 다시 학생이 되었다. 박사과정생과 엄마라는 두 개의 모자를 쓰고. 


가끔은 힘이 부친다. 공부도 내가 원하는 만큼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훌륭한 엄마가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일도 반쪽, 육아도 반쪽짜리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머리도 예전 같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한창 전력 질주해도 모자란 시간에 아이들이라는 모래주머니를 매고 꾸역꾸역 한 걸음씩 내딛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좋다. 


엄마라는 이름과 함께 성장판이 닫혀버리는 게 아니라, 엄마로서의 나도, 한 사람으로서의 나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내 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씩 숨 가쁘게 처리해내다 지난 한 달을, 한 학기를, 그리고 1년을 돌아볼 때면 등산을 할 때처럼 땀을 훔치며, 정상 위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가 지나온 언덕과 고비와 오르막길을 내려다보는 가슴 벅찬 뿌듯함이 있다. 


아이가 커서 뭐가 될지를 기대하는 마음만큼이나, 나는 커서 뭐가 될지를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책은 그 성장의 기록이다. 엄마로서도, 학자로서도 아직 갈 길은 멀고도 멀지만 그 긴 여정 위에서 마주한 소소한 마음들이다. 그 마음이 아직도 고민하고 방황하고 성장하는 사람들에게도 가 닿기를. 잠깐의 온기를 전해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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