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직장생활을 했고, 특히 남녀노소 두루 만나야 하는 직종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임'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나아가 가끔 농담조로 이런 얘길 꺼내면 다 거짓말이거나 부러 하는 소리라고 여긴다.
"XX 씨가 그렇다면, 난 중증 대인기피증이다"는 식으로 응수해오는 것이다. 그만큼 내가 포장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각종 모임 중에서도 가장 싫어하는 모임은 동창회, 학부모의 모임 등이다. 고등학교 동창회는 아예 하지 않아 나간 적도 없다.(아니 나 빼고 했을 수는 있겠다). 대학 동창모임은 몇 년에 한 번씩 하거나, 삼삼오오 모일 때 불려 나가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에도 여자들만 동창회를 했는데 나가기 한 시간 전까지 고민했다.
학부모 모임은 이제 완전히 졸업해서 정말 기쁘다. 그러나 가끔 이전에 알던 모임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연락이 온다. 이 모임은 같은 학교의 학부모로 출발한 모임은 아니지만 엄마의 나이와 자녀의 나이가 비슷해 늘 자녀들이 화제가 된다.
나는 이런 모임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이 고민이었다. 사회성이 매우 결여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다.
내가 아주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만나면 즐겁게 대화하는 편이다. 다른 사람도 모임이 싫은 걸까. 자연스러운 걸까.
아니면 내가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조급증이라도 있는 걸까.
동창회에 열심히 나가는 부류는 두 가지라고 한다. 돈 자랑을 하고 싶거나, 돈을 부탁하고 싶거나.
난 둘 다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그 모임에서 딱히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전체 동창회든, 여자들만의 동창회든 나갔다 오면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웃으며 얘길 나누고 자리를 파한 뒤에는 그 대화들이 며칠 동안 내 머리를 휘젓는다.
사람이 많이 참석하는 동창회의 경우, 걔 중엔 과거에 대화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제와 근황을 나눈다. 동창회 나오지 않았으면 혹여 한 번이라도 궁금해하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또 과거에 친분이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각자 떨어져 아무런 공감대가 없다. 그래서 자꾸 옛날 얘기를 꺼낸다. 부질없다.
겉도는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결국 남 얘기로 일관한다. A가 대기업 이사가 됐다, B가 대형 로펌에서 잘 나간다, C는 사업이 망해서 소식이 끊겼다...
모임을 끝나고 집에 오면 귀에서 윙윙 소리가 들린다. 소음이다. 그러다가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에서 오늘 대화에 나왔던 사람의 이름을 검색해본다. 주로 잘 나간다는 사람들이다.
괜스레 비교를 해본다.
또 나이가 나이니만큼 정치적인 편이 나뉘기도 한다.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대꾸하기도 싫은데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건 단톡 방이 심하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끈이 없는데도 과거 4년간 대학을 같이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만나야 하는 걸까. 그냥 좋아서도 아니고 외로워서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의 자산을 활용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 자산을 그들에게 나눠주고 싶지도 않고, 나도 별로 덕보고 싶지 않다. 굳이 그 모임에 나갈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그럼에도 내가 과감하게 모임을 거절하지 못하고, 단톡 방을 탈퇴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밴드 앱을 까는순간 몇가지 모임이 생겨버린다.
'튀고 싶지 않아서'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싶지 않아서' 아닐까.
'가만있으면 보통은 된다'는 말이 있듯이 , 나는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배제돼서 별난 사람도 되기 싫은 까닭이 크다.
여자 동창모임은 또 다른 묘한 감정을 유발한다. 걔 중엔 한때 단짝도 있었고, 반대로 싫어했던 사람도 있다. 지금은 모두 사회적으로 제 몫을 하고 있고 매우 예의 바른 친구들이라 모임도 젠틀하다. 덕담이 오간다.
그런데 모임이 끝나는 순간 피로하다. 내가 너무 좋은 사람의 모습을 연기한 것만 같다. 스무 살의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나 보다. 그래서 애써 좋은 말, 밝은 표정을 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회인으로서 연기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나는 지금까지 사회적 동물, 사회적 인간으로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는 혼자 있고 싶고, 진짜 마음에 맞는 사람 몇 명과 단출한 만남을 갖고 싶을 뿐이다. 거리가 먼 사람의 얘기를 알고 싶지도 않고, 정치적 주장을 사적인 자리에서 듣고 싶지도 않다.
평생을 이어온 이 노력은 언제 멈추어야 할까. 노력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과, 그래도 노후를 위해 네트워크의 끈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반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