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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P Feb 12. 2023

사랑하는 일

동물과 환경vs가족(연인)

코로나19 사태로 무려 4년간 입국하지 못했던 친언니가 위드코로나 기세로 마침내 한국에 왔다. 그것이 그러니까 벌써 지난해 여름의 이야기고, 언니는 일찌감치 다시 돌아갔다. 해외에 정착한 셈인 언니에게 이번 방문은 휴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만에 함께하는 매순간이 애틋했고, 혈혈단신 타지 생활로 입은 상흔을 다독이느라 분주했다. 특히 막판 스퍼트를 달려야 했던 마지막 달은 말할 것도 없다. 한동안 그리울 것들, 뒤늦게 떠오른 그리웠던 것들을 해소하고자 매 주말과 마지막 주를 통으로 바쳤는데도 마뜩잖았다. 앞선 두달도 순순히 보낸 것은 아닌데 아쉬움은 할 수 없이 남았다.

그리움은 대체로 본능적인 데서 훅, 하고 솟구치는 법이라 우리는 대체로 먹는 일에 주력했다. 어머니가 손맛이 좋고, 언니가 벌써 7년차의 요리사이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채식단은 어느새 뒷전이 됐다. 물론 누구도 내게 동물성 식단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같은 식단을 공유하고 같은 즐거움을 향유하는 가운데서 피어오르는 정이 문득 떠올라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아닌 것 같아도 먹는 것을 가르는 일은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얕은 긴장감을 조성하기 마련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나누어 먹는 문화가 자리 잡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처럼의 단란한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은, 또한 한정된 시간을 더욱 돈독히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강화될수록 비건 지향의 신념은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행동이었고, 한시적이라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으니 솔직히 행복할 줄 알았다. 비록 동물성 지방이 맛있다는 감각은 잃었지만 배려하고 공통의 경험과 기억을 쌓는 데서 오는 기쁨이 더 클 줄 알았다. 하지만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어쩐지 기분이 처참해졌다. 왜그런고 하니 삶에서 지켜내고 싶던 것들이 수에 밀리고, 다져온 시간에 밀려 다시 들여놓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 쉽게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다시 말해 신념을 한뼘씩 양보할 때마다 삶이 세걸음씩 뒷걸음질치는 느낌이 들었다.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제자리걸음일 줄 알았건만, 뒷걸음질치고 있다니 유쾌할리 없었다. 나는 차츰 생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옳다고 믿은 무언가를 저버린다는 것은 바람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풍선과 같다. 내 행위 하나 하나와 매일에 의미를 부여하던 것들이 줄어들자 볼품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건지향이 나 자신의 삶보다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회에서 제 역할과 쓸모를 다하고 있다고 믿던 나는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조금씩 쓸려내려가고 있던 것이다.  

그러자 어느새 아쉬움은 멀찍이 물러서고 언니가 돌아갈 날을 셈하기 시작했다.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언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평소보다 푸지게 동물성 식단을 차리는 어머니, 아이스크림을 연달아 사가는 나 자신(식물성 아이스크림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던 언니의 후기 때문에..), 뉴질랜드에서는 구하기 어렵다거나 비싼 물품들을 가방이 터질 듯 사재기하는 언니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다. 단순히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 하나를 바꾸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환의 고리를 맺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불합리한 구조와 체제에 동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이 모든 일이 압축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불안은 빠른 속도로 증폭했다. 아마도 시간을 더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면 나 역시 자기합리화에 의해 타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일은 무서운 속도로 진척됐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상념에 휩싸였다.


1년 전쯤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덕통사고를 당해 최애와 결혼하겠다는 결의를 세운 탓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무어냐며, 그에게 '다가설 방법'만 고민하던 중 “그가 비건지향이 아니라도 괜찮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장에는 그이기만 하다면야, 그에 한정해 괜찮다고 답했지만 그 이후에야 고민이 깊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연애에도 결혼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사실 관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바라던 대로 최애와 결혼을 하려는데, 아니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연애를 하면서 그가 전혀 비건지향에 관심이 없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간섭하지 말자고 한다면? 때로 그가 바빠서 내가 그의 식사를 준비해줘야 한다면? 그때 그가 비건식에 호의적이지 않다면? 그가 소비벽이 과하다면? 등... 그때서야 비건지향이 관계에 미칠 영향이 현실로 다가왔다. 또한 찐심이라고 생각했던 내 사랑은 얼마나 헛되었는지도. 그 고민을 한 달간 치열하게 해낸 끝에 결국 나는 열렬했던 그 사랑을 접었다. 그런 일이 닥치면 생각하자는 마음을 반절 정도 남겨두긴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다방면으로 과소비를 일삼는 연예계를 이해하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처럼 상상만으로도 어려웠던 일이 친언니와의 관계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언니와 내 관계는 일반적인 자매들보다 각별한 편이다. 언니가 내게 주는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 이상이다. 부모님은 그 시대의 문화가 그렇듯 아무렇잖게 깎아내리는 말을 툭툭 내뱉고, 어린 시절 보여준 잦은 다툼으로 기저에 불안을 조성했다면 언니는 본인이 그 아픔을 다 받아내서라도 내게 깊은 상처가 남지 않도록 끌어안아준 방호막이었다. 그런 우애가 부모님의 의도로 길러진 것이라 할지라도, 언니가 나를 진심으로 아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사이가 돈독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내게도 언니는 특별하다. 반대로 언니가 나약해지는 순간에 내가 우산이 되고, 방패가 되겠다 다짐했을 정도로 특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만큼은 이토록 강한 사랑 앞에서도 내려놓을 수 없음을 이때 나는 깨달았다. 신념이 즉 내 정체성이고 삶의 방향성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로 신념에 대해 우습게 생각한다. 신념이 할 수 있는 일을 얕잡아본다. '비건'을 일부에서는 '살림'이라고 번역하는데, 실로 나는 비건이라는 이념 덕분에 긴 회의주의의 터널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비건을 등대 삼아 나아가며 점차 삶에 대한 의욕을 회복하면서 더 이상 신념과 신앙을 가진 이들을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믿는 대상이나 이념이 무엇이든 방황하거나 무기력하거나 내몰리던 이들이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게 했다면 그 자체로 의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이 깊이 뿌리내릴 때 사람은 단단해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단단한 사람이라는 건 자신만의 신념을 형성한 사람이 아닐까. 신념이 부재하거나 약한 사람들이야말로 세상과 끊임없이 마찰을 겪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을 지키는 일이 그 무엇에도 우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념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내 존재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자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자신에 대해 올바르게 인지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존감도 자애(自愛)도 충만하며 그렇기 때문에 타인도 그만큼 소중한 객체임을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안다. 내 삶이 헝클어져 여유를 잃었을 때 타인을 향한 사랑과 관용을 기대하기 어렵듯이 말이다. 겉보기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신념에 밀려나는 것 같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려깊은 마음을 길러내기 위해, 먼저 손을 내어주고 마침내는 손을 맞잡기 위해 신념을 지켜내는 것이다. 마침 내가 실천하고 있는 ‘비건‘의 코어 정신도 그러하다. 한정된 ‘우리’가 아니라 폭넓은 관점에서 ‘우리’가 모두 존중받고 잘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해 죽임보다 ‘살림’을 택하자는 것이다. 타 생명체를 해치는 이유로 어떤 것도 적절하지 않다. 또한 해치는 사람의 심신에도 결국 고통 속에 죽어간 생명의 슬픔과 그늘이 깃들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지인이 본인의 꿈을 위해 연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경우 대개 안타깝긴 하지만 자신을 우선으로 한 선택이니 응원부터 해줄 것이다. 나 또한 내 지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를 위한 선택이니 나중에 후회가 적을 것이라고. 내 신념도 그렇게 응원받고 존중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비건지향이라는 것이, 소수의 이념이라는 것이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내세워야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해줬으면 좋겠다. 사회문제에 눈 뜨듯 알아보려고 해줬으면 좋겠다. 쉽사리 변할 트렌드 따위로 격하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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