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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Dec 03. 2022

작지만 확실한 한입

한입에 500원?

라면 국물 한입이 절실했다. 아는 맛이 무서운 법. 감칠맛 나는 MSG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방금 한술 뜬 밥이 목구멍에서 막히는 것 같은 순간. 눈앞에 포착된 라면 국물이라니.



오래전 일이다. 남자친구가 예전에 일했던 회사 근처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라면 알밥집이 있다고 해서 함께 갔다. 고작 라면을 먹기 위해 서울 도심 한복판 막히는 도로를 뚫고 찾아가다니. 더구나 그 맛집이라는 장소는 작고 허름했다. 이런 게 숨은 맛집의 내공인걸까. 그렇게 라면알밥 세트를 처음 먹게 됐는데, 세상에. 너무 맛있다. 분명히 신라면으로 끓였는데, 내가 아는 그 맛이 아니다. 국물에 뭘 더 넣은 게 분명한데 정말 맛있게 매웠다. 텁텁하지도 않고 깔끔하게 얼큰한 맛이랄까. 그리고 이게 좀 맵다 싶을 때 세트로 나온 알밥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금세 매운맛이 중화되면서 다시 또 라면을 퍼먹게 되고 다시 알밥을 한 숟가락 먹고...이런 식으로 쉬지 않고 계속 먹게 되는 무한루프에 빠져 버린다. 그러니 맵찌리 남편도 이 집의 매운맛을 못 잊고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거겠지.



그렇게 라면 알밥을 한 차례 영접하고 다시 그 식당을 함께 갔다. 두 번째 방문이라 나는 작은 식당을 더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이곳 간판이 ‘초동알밥’이었고 이름에 걸맞게 메뉴판에는 정말 다양한 알밥이 있었다. 함께 간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라면알밥을 시켰지만 나는 다른 알밥 메뉴를 먹어보고 싶었다.

“나는 00 알밥 먹을래.”

“라면 안 먹고?”

“응 그건 저번에 먹었잖아. 다른 메뉴도 먹어보고 싶어. 다른 것도 맛있을 거 같아”

“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 집은 무조건 라면 알밥을 먹어야 해.”

그는 확고했다. 그리고 마치 내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절대적으로 라면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면에서 꽤나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이라 오기가 생겼다.

“아니야. 라면 안 시켜도 돼. 다른 것 먹을래.”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라면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아, 저 매운맛. 새로운 메뉴도 먹고 싶지만 이미 알고 있는 저 맛있는 맛도 먹어 보고 싶을 때는…그래, 바로 그거야!

“오빠, 나 국물 한입만 먹어보면 안 돼?”

한입만. 이 얼마나 좋은 해결책인가.

그러자 그가 발끈했다.

“거봐, 내가 라면 시켜야 한다고 했잖아.”

“아이, 정말 왜 그래? 한 입만 주라.”

“안 돼. 내가 시키라고 할 때 안 시키고 이제 와서 왜 이래.”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지.

“에이, 정말 왜 그래. 그럼 라면 국물 한 입만 주면 500원 줄게!!”

개그맨 허경환이 개콘에서 꽃거지로 나와서 “궁금하면 500원”을 외쳤던 때다. 얘도 어른도 사용하는 유행어였고, 내 장난기가 발동해버렸다.

그런데 식당 종업원인지 사장님인지 아무튼 서빙도 하시고 계산도 하는 아주머니가 주방 근처에서 우리 대화를 들었나 보다. 500원이란 말에 갑자기 ‘풉’ 웃는다. 그리고는 쓱 다가와서 하는 말.

“나눠 드실 수 있게 앞접시 좀 드릴까요?”



전후 사정을 모르는 그녀에게 그는 여자친구한테 라면 국물 한 입도 허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인색한 사람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얼마나 한 입이 먹고 싶었으면 500원으로 협상까지 하려고 했을까. 아주머니의 뜻밖의 지원사격으로 그는 자기 뜻대로 최고의 메뉴를 고르지 않은 나를 친히 용서하고 라면 국물 한 입을 허락했다. 크흐, 그때 그 국물맛은 첫날보다 더 맛있었던 것 같다.



한입만. 사실 나는 이 말에 꽤 인색한 사람이이었다. 어렸을 때 한입만 먹겠다고 하고 크게 한입 물어서 절반 이상을 먹는 욕심쟁이들이 있었고, 한 입만 먹고 싶다고 하면 꼭 혈액형을 물어보는 까다로운 얘들도 있었고, 중학교 때는 얘들 도시락 반찬을 뺏어 먹어야지만 자신들의 위상이 선다고 생각한 날라리 얘들이 꼭 점심시간마다 돌아다니면서 한입만을 가장해 햄이나 계란말이처럼 맛있는 반찬만 약탈하는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한입을 달라고도 하지 않고 한입을 권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왜 그랬을까. 그 라면 국물이 정말 탐날 정도로 맛있기도 했지만 그가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라 그랬을 거다. 500원까지 들먹이는 건 너무 너무 진상이었나 싶다가도 안 주려고 하니까 더 놀리고 싶기도 했고, 그냥 그렇게 투닥투닥하는 게 자체가 알콩달콩인 시절이기도 했다. 그 때 나는 한입에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나눠 먹는다는 건 원초적이고 따뜻한 믿음이었다. 그걸 서슴없이 먼저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순순히 나눠주는 것도. 그 뒤로 그 남자와 한솥밥 먹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그 500원짜리 한입이 일을 이렇게 키운 걸지도.

 

+커버이미지_초동알밥 인스타그램 cho_dong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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