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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Nov 06. 2023

턴테이블과 에디트 피아프

집에 턴테이블과 레코드를 들여놨다.


모든 결정과 선택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금요일 하루 대체휴무를 내면서 남편과 함께 집 근처 구청을 찾았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어보기 위해서였다. 요새 식당 밥값이 원체 비싼데 5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있고, 메뉴 고민과 선택장애에서 벗어나 그저 주는대로 먹을수 있다는 편리함. 어린시절 급식과 대학교 학식이 떠오르는 추억은 덤이다. 이런 이유로 집에서 혼자 일하는 남편이 가끔 이용하면 딱 좋아보여서 같이 길을 뚫어주러 간 것. 그렇게 카레와 미니돈가스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1층 북카페 라운지를 둘러봤다. 그러다 그곳을 만났다. LP감상실.


다락방 같은 복층식 구조물에 사랑방처럼 만들어놓은 아담한 공간이었다. 턴테이블 3개와 클래식, 영화OST, 팝 등 다양한 컬렉션이 있었다. 남편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골라 함께 들었다. 첫번째곡에서 두번째 곡으로 넘어갈 때 지지직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좋았다. 나무 장작이 불에 탈 때 내는 소리와 유사했다. 매번 일할때 노동요만 틀어놓다가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음악감상을 끝내고 참 좋았다는 말을 서로 나누고 집에 돌아갔다. 추억의 학식 분위기의 식사를 하고 턴테이블에 음악감상이라니. 시간여행이 따로 없었다.


시간 여행의 부작용이 나타난 건 저녁 무렵. 턴테이블 가격을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싸다. 입문자용은 20만원~30만원이면 산다. 그리고 쿠팡로켓배송은 지금 구매하면 내일까지 집으로 보내준다니! 하루배송은 구매 욕망을 더 부추겼다. 근데 그걸 사면 어디두지? 마침 남편이 매일 늘어놓고 사는 책상 귀퉁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치우니 자리가 딱이잖아. 내일 턴테이블이 들어온다쳐도 들을 레코드가 없잖아? 걱정마! 예스24에서 구매하면 바로 다음날 도착한대. 무언가에 홀린듯 일사천리 충동구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난 나머지 나는 이 일이 마치 오래전부터 운명지어졌다는 예감마저 들었다. 미래의 시간여행을 했었던 내가 불의의 사고로 잊었던 기억의 일을 다시 하고 있는 거라는.


다음날  토요일 점심. 남편과 (데이트 겸) 엘피원정대를 꾸려 종로3가 12번 출구역 앞으로 출동했다. 좋은 레코드를 값싸게 사겠다는 가성비 전략으로 갔지만 이 판의 시장 가격을 알고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러니까 아이유 꽃갈피  한정판은 처음 출고됐을 때 3만원대였으나 지금 중고 거래가는 20만원. 심수봉 베스트는 9만원. 이문세 4집은 10만원. 마츠다 세이코 싱글은 2만원. 화양연화 ost는 10만원. 어마어마한 가격에 놀랐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발견했다 가격표보고 내려놓기를 반복하던 우리 커플은 엄청난 심사숙고 끝에 에디트 피아프와 류이치 사카모토를 각각 하나씩 사고 총 12만원을 지출했다. 바이닐 수집을 취미로 가지려면 어마어마한 부자여야 한다는 걸 깨달으면 씁쓸한 마음을 안고.


이 일이 어지간히 현타인게, 사실 이 엄청 비싼 음악들을 유튜브에서 찾으면 얼마든지 무료에 가깝게(인터넷 통신료 비용과 유튜브 구독료가 있다)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츠다 세이코만 해도 그렇다. 그녀의 20대 시절 앳띤 얼굴과 사람을 언제든지 청춘의 한 시절로 옮겨버리는 마력의 목소리는 인터넷에 박제되어 플레이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만원을 주고 싱글 앨범을 사다니! 미친짓이다! 그런데 왜 자꾸 중고장터를 검색하고 있니, 이 망할 손가락아.


당일 배송된 턴테이블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조립을 끝내고 음악을 플레이한 순간, 나는 온갖 논리적이고 타당하고 합리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아아, 이 바보같은 선택을 계속 하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음악을 너무 쉽게 플레이하고 그저 귀를 스쳐가는 노동요로만 들었다는걸 깨달았다. 음악을 틀기위해 엘피판이 긁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들어올리는 것, 앞면 플레이가 끝나면 뒷면을 직접 뒤집어야 하는 수고로움, 몸에 약간 힘을 풀고 늘어져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에만 집중하는 것. 이 일련의 의식들이 음악감상의 시간을 온전하게 해줬다. 곡과 곡 사이의 잡음, 음반이 한번씩 튈때 마다 나는 불협화음은 또 어떤가. 마치 삶은 완전무결한 방음 속에서 있지 않으며, 잡음은 의도적으로 지울 수 있는 인위가 아님을, 온갖 불순물이 낄 수 밖에 없는게 우리 삶이지만 어쩌면 그 오점들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 노래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싼 바이닐을 수집하되 1년에 2개만 사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10년 모으면 그래도 20개나 모을 수 있다. 고가이고 제한적이다 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찾던 음반을 우연히 발견해도 너무 비싸면 만족도가 떨어지니 사지 않는다. 더 기다려서 만족할 가격에 구입하는 게 기쁨이 더 클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 고가와 희귀 사이를 잘 넘나들어야 하는 어려운 취미다.


하지만 이렇게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들이며 나는 기어이 마음이 울컥해진다. 아주 옛날 우연히 들었던 노래가 이제 내 영혼에 아로새겨진다. 그때는 이 음악을 받아들일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걸까. 지금 턴테이블에서 재생되는 목소리는 비행기사고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한 여자의 마음속에 멈출 수 없는 사랑이 가득하다는 걸, 하루하루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는 것은 삶의 존재 이유를 잃는 일임을 절절하게 호소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된다. 내 인생과 사랑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느껴진다. 나는 너무 미미한 존재지만 이 노래를 플레이할 때마다 기필코 울컥을 삼키고 노래하리라. 나를 지금껏 살게한 건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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