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의 열기가 식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남편과 1박 2일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도로의 표지판에 새겨진 지명의 뜻풀이를 찾아보며 논다. 먼저 궁금한 지명을 고르고, 뜻을 추측하고, 운전하는 남편을 대신에 내가 스마트폰 사전에서 뜻을 찾아 읽어주는 식이다. 재밌는 지명이 많다. 구파발은 파발제도에서 유래했다. 임진왜란 이후 횃불에 의존하는 봉수제가 사실상 기능을 잃으면서 발 빠른 사람과 말이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파발제도를 시행했다. 25리 간격으로 말을 교대해야 했으므로 그 자리마다 파발막이 세워졌다. 구파발은 서울돈화문에서 벽제와 파주로 이어지는 파발막이 있었던 곳이었다. ‘불광동’은 옛 불광사 절터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부처님의 광명, 즉 지혜의 불빛으로 중생의 어두움을 씻는다는 뜻이다. 고작 ‘불광동 휘발유’나 생각해낸 미천한 연상 작용이 부끄러워 질 만큼 큰 자비를 담은 동네였다. “노원은 무슨 뜻일까?” 문득 우리가 사는 곳의 지명이 궁금했다. 우리는 늙은 노, 언덕 원 같은 알만한 한자 뜻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사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갈대 노蘆 언덕 원原. 갈대라니. 내가 뱉은 첫마디는 “갈대 ‘노’자가 있었어?”였다. 새로운 글자를 처음 배운 어린아이 같았다.
옛날 이곳은 갈대가 무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갈대가 얼마나 많았으면 행인들이 불편을 겪으니 지금의 노원역 부근의 여관인 원院 을 설치해 ‘노원’이라는 지명이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상계, 중계, 하계...동네 이름마다 시내 계溪를 끼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갈대의 생육 환경인 강변이 많았을 것 같다. 불암산과 수락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모여들어 실개천을 만들고 다시 강을 이뤄 한강으로 흘러나갔으리라. 그 물줄기를 따라 얼마나 많은 갈대가 피어올랐으면 ‘갈대의 언덕’이라는 지명까지 얻게 됐을까. 지금 아스팔트가 깔리고 아파트가 세워진 이 땅이 갈대 군락이 있었던 곳이었다니. 여리고 온순한 것들이 한순간 스러진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 버린다. 이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 마음에 갈대 인덱스를 하나 붙인다.
하지만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갈대는 그저 멋진 장관을 이루는 풍경일 뿐. 비슷하게 생긴 억새와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억새는 주로 산지, 갈대는 강변에 핀다고 한다) 이곳이 멋진 갈대밭이었다는 상상을 해보지만 어쩐지 부피감 없는 납작한 상상이었다. 어린 시절 갈대밭에서 뛰어놀다 날카로운 잎에 피부를 자주 베였다는 남편의 이야기처럼 내 실존에 뿌리내린 갈대밭은 없었다. 빽빽한 갈대밭에 몸을 숨긴 연인의 피부에 닿은 날카로운 갈대잎이라든가, 그 잎과 뿌리를 식용과 약재로 쓰기 위해 손으로 캐고 혀로 느끼는 그런류의 리얼리티가 없는 상상이었다.
며칠 후 집 앞 당현천 산책로를 걷다 갈대를 만났다. 바람이 불고 갈대가 일렁였다. 아, 지금 이 계절의 바람은 정말 좋다. ‘좋다’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나는 이런 바람을 100% 신선함의 밀도를 가진 바람이라고 부른다.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면 폐의 세포 하나하나가 흔들리며 깨어나는 느낌이다. 그 순간 내가 그대로 바람이 된 것 같을 정도로. 갈대도 바람을 이렇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걸까. 내 엉뚱한 의문이 마음 한 귀퉁이에 바람을 불러일으키더니 갈대 인덱스가 파르르르 떨린다. 이어 조금 더 거센 바람이 일자 페이지가 화르르륵 넘어간다. 내 안에선 자라난 거대한 갈대밭이 2차원적으로 펼쳐진다. 이왕 이렇게 상상하기 시작하자 특별한 손님들을 초대해 이 공간에 질감을 부여해보기로 한다. 참석자들 중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먼 과거의 사람도 있지만 어차피 내 머릿속에서 열리는 모임이니 금세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 이들은 저마다 갈대, 특히 흔들리는 갈대에 묘하게 끌린 사람들이니 갈대 모임이라 이름 붙여 볼까. 2차원의 갈대밭에 사람의 숨결과 말을 더하고 공간과 시간을 켜켜이 쌓으면 3차원의 갈대밭이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품으며.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가 먼저 들린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나 : 어서 오세요. 김소월 님. 당신이라면 갈대 모임에 들어올 자격이 충분하죠. ‘엄마야 누나야’에서 갈대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내셨잖아요.
소월 : 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 당신에게 있어 흔들리는 갈대 풍경은 어떤 의미였나요?
소월 : 사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당시 저는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었습니다. 생활고에 지칠 때면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했어요. 그럴 때면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었죠. 이젠 돌아갈 수 없지만, 어쩌면 제가 직접 겪은 어린 시절도 아닌, 상상 속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봤고, 그게 갈대가 있는 풍경이었죠.
나 : 저도 소월님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줄은 정말 몰랐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죠?
소월 : 제 부친은 제가 3살 때 일본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그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다 돌아가셨습니다. 다행히 광산업을 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일제강점기 시대에 집안은 점점 몰락해가고 있었어요. 집안을 일으키고자 할아버지가 남은 재산을 긁어모아 저를 일본으로 유학 보냈지만, 대지진 사건으로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어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처가의 고향으로 내려가 신문사를 차렸지만 그것마저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가장으로서 돈을 벌고 싶었지만 계속 일이 꼬였고, 아버지의 부재를 원망하다가 그리워하다가를 반복하곤 했습니다. 그런 감정들이 쌓여 아름다운 강변 위의 집이라는 이상향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마음이 그곳에 가닿으면 시가 흘러나오곤 했죠. 하지만 시가 밥 먹여주는 게 아니어서 제 노트에는 시어보다 집과 돈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이 적혀 있었죠.
나 : 당신이 33살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지만 어쩌면 자살이 아니냐는 설이 나온 것도 경제적 어려움이 한몫 했던거군요. 그리움으로 쌓아올린 당신의 갈대밭을 제가 조금 빌려가도 될까요.
소월 : 그러시죠. 이제 제 것이 아니니까요.
파스칼 : 안녕하세요, 블레즈 파스칼입니다.
나 : 네 안녕하세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을 남긴 분이니 마땅히 이 자리에 오셔야죠.
파스칼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 당신은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인간의 나약함을 떠올렸던 것이죠?
파스칼 : 그렇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 분야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10대에 이미 저만의 방정식을 발명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몸이 많이 허약했고, 청년이 되면서 극심한 두통을 앓았어요. 병세는 심각해져 결국 40세가 되기도 전 경련 발작으로 죽어요. (여기 요절 모임 아니죠?) 머리가 아플 때면 조용한 강변에 나가 산책을 했어요. 그러던 중 바람을 따라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를 보고, 제 육신과 닮았다고 생각했죠. 오랫동안 육체의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왜 태어났고 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소명을 찾길 바라요. 그래서 저는 제 인생 전체를 통찰했고 비록 육신은 나약하지만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유를 통해 우주와 신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것이죠. 그게 제가 살아야 할 이유였습니다.
나 : 그럼 갈대는 당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한 생각의 매개체가 됐었다는 거네요.
파스칼 : 그렇죠. 인간은 약하지만, 생각하는 인간은 강하니까요.
나 :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의 생각을 곱씹어보면 인간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갈대를 너무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갈대며 식물이며 인간보다 약하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하지만 그건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야기 아닐까요.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한 자리에서 거대한 군락을 이룬 갈대가 다음해 다시 그 자리에서 생명을 피우는 것도 위대한 일 아닐까요.
파스칼 : 바로 당신 같은 방식으로 갈대를 의인화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사유하는 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거죠. 나처럼 사유를 잘하면 깊은 깨달음도 얻을 수 있고요. 하지만 갈대가 생명으로서 강인한 존재라는 의미를 갖는 것도 결국 당신의 사유를 통해서일 뿐. 자연물로서 갈대는 그저 갈대일 뿐이에요. 당신은 갈대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저 당신의 사유 속에서 의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신경림 : 열띤 토론 중인 것 같은데요, 들어가도 될까요.
나 : 아, 어서 오세요. 신경림 시인이시군요.
신경림 : 당신이 제 시 중에 ‘갈대’를 좋아한다고 해서 들렀습니다.
나 : 한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보고 감동받았던 시인데, 이렇게 다시 기억하게 돼 다행입니다.
언젠가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나 : 갈대를 흔드는 것이 자신의 조용한 울음이라는 대목에서 여전히 마음이 찌릿해지면서 뜨거워져요.
신경림 : 그건 당신이 고독을 삼키고 울어본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나 : 선생님, 이건 오롯이 제 개인적인 감상이긴 한데요. 전 이 고독을 삼킨 울음이 영화 ‘마더’의 혜자의 춤사위와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리자 무죄임을 밝혀내려는 혜자는 점점 집착과 광기를 드러내잖아요. 결국 드러난 진실의 비수가 혜자의 삶 전체를 찌르던 순간, 혜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들판에서 흐느적거리면서 이상한 춤을 춰요. 그리고…그곳에 갈대가 있었어요. 갈대는 혜자의 독무를 위무하듯 함께 흔들려요. 혜자는 마치 갈대처럼 휘청거려요.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사람은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치만 아주 거대한 고독과 고요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텅 빈 눈으로 두려움을 쫒으며 말이죠.
신경림 : 허허, 그 봉감독이라는 사람… 사람이 슬퍼서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보구려.
나 : 선생님도 ‘농무’라는 시에서 농민들이 저마다 슬픈 사연을 끌어안고 신명나게 춤추며 한을 승화시키죠. 혜자도 갈대밭에서 갈대 속에서 춤을 추지만, 마지막엔 관광버스 안에서 망각의 침을 자기 허벅지에 스스로 찌르고 무리 속에 섞여서 춤을 춰요. 저는 아직도 그 장면을 돌려보면 숨이 막혔어요. 그녀는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있으니 죽지 못하고 살아야 했어요. 마치 삶이 형벌인 것처럼요. 춤추는 무리는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지만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몸부림 같았어요. 그 움직임은 마치 살려달라고 구조 요청 같기도 했어요. 춤이, 인간의 춤이 어쩜 이렇게 슬플 수 있나요.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묵언의 동의가 스며든다. 이제 대화를 끝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갈대 인덱스 페이지가 두툼해졌다. 그 끝에 문장을 적는다.
“인간은 춤추는 갈대다.
유구한 시간 속 사라진 갈대의 땅에서 인간은 갈대처럼 춤을 추며 살아간다…”
마침표를 찍진 않는다. 앞으로 어떤 문장이 더 추가될지 모르기에 여분의 페이지를 남겨둔다. 갈대밭은 그새 그리움의 자양분 위에서 더 무성하게 자라난 것 같다. 바람이 한차례 일렁이자 마르고 거친 잎들은 쏴와와와 소리를 내며 바람의 흔적을 더듬는다. 서쪽으로 지고 있는 나른한 해가 공중을 기다랗게 가르며 잎의 끝에 닿자 솜털이 반짝반짝, 떨린다. 생이 찬란해서 혹은 두려워서 춤을 춰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이 페이지를 둘둘 펼치리라. 가장 볕이 쨍하고 바람이 산들거리는 날을 골라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갈대를 따라 춤을 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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