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현 Jan 30. 2023

20대 어느 날 나의 지독한 실연과 어떤 케첩통

20대 어느 날 나의 지독한 실연과 어떤 케첩통


브런치 레스토랑의 하얀 식탁 위에 케첩통이 있다. 이 가게에서 보통 케첩통은 7일 정도 식탁 위에 머문다. 이제 거의 밑바닥을 보이는 이 케첩통은 몇 시간 후면 폐기처분 될 것이다. 그동안 여러 사람의 손이 케첩통에 닿았다. 사람들이 케첩통을 쥐어짜면 케첩은 아기가 자궁을 빠져 나오듯 사력을 다해 좁은 통의 입구를 빠져 나와 접시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거나 스크럼블 위에 마구잡이 흩뿌려지거나 프렌치 프라이의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렸다. 케첩통은 계속 자신을 짜내는 사람들의 손길에서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온기였다. 처음 인간의 손을 접한 순간, 케첩통은 그 따뜻한 온기에 너무 놀라고 말았다. 공장에서 태어나 이 식당에 오기까지 그에게는 차가운 금속성 접촉만이 있었다. 그것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한 과정을 통해 케첩통을 만들고 이동시켰다. 똑같은 모양의 케첩통들과 함께 상자에 담겨 어두운 트럭에 실려 갈때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식당 주인의 손이 케첩통에게 닿는 순간, 그 따뜻한 온기에 그만 자신이 수많은 케첩통 중에 하나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하얀 식탁 위에 내던져진 케첩통은 매일 그 온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길은 잠깐 그를 스쳐갈 뿐이었다. 따뜻함을 느꼈지만 점점 텅 비어갔다.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저 식당에 필요한 물건이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공감도 통찰도 희망도 없었다. 사람들의 손길을 닿을수록 케첩통은 자신의 생을 조금씩 나누어주며 점점 죽음을 향해 내달렸다.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길 갈구했지만, 모두 케첩을 쭉 짜버리고 내팽겨쳤다. 점점 젊은 시절의 신선함도 바래가고 생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이젠 이 생에 무엇인가가 되겠다는 자신감도 잃어갔다. 어떤 정밀한 설계로 태어난 철저하게 어떤 수단으로 쓰이다가 어떤 정확한 소멸 과정을 겪게 되는걸까. 식당 불이 꺼지고 어두워지면 손길을 만나 생의 다른 의미를 발견하기 전 상태가 어렴풋이 꿈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엄밀하고 정확했던 그 과정은 그저  뿌연 빛의 헝클어진 혼란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날은 특별했다. 그녀의 손길은, 식탁 모서리에 자신을 내리치며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장난꾸러기 아이의 손길과도 달랐고, 화려한 화장과 귀금속을 달고 사교와 질투 사이의 대화가 은밀하게 오고갔던 여자들의 손길과도 달랐고, 예의바른 식사를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철처한 무관심이 손길에까지 느껴져 소름이 돋았던 그런 터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의자에 무너질듯 앉은 그녀는 피곤한 음색으로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 침울한 나머지 밤을 새서 울고 난 뒤 장례식 추도문을 읽는 사람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녀의 텅 빈 눈빛은 주변 사물을 맥없이 따라가다 놓치곤 했다. 케첩통 역시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얼마 안 남은 생의 끝자락 앞에서 서서히 증발하듯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케첩통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케첩통을 어루만졌다. 케첩통은 깜짝 놀랐다. 그 손길은 자신의 종말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케첩통을 어루만지던 여자는 관뚜껑을 닫듯 아주 힘겹게 눈꺼풀을 내렸다. 닫은 눈 아래로 눈물이 떨어졌다.



여자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와 이별해야 한다. 아니 그 남자를 사랑했던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살 수 있는 지독한 이별이었다. 처음 남자를 사랑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만 모든 마음을 주고 만 자신을 탓해야만 했다.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던 때를 떠올려본다. 남자는 불가항력적인 절망으로 삶의 의지를 잃은 여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매일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그녀를 돌보고 먹이고 재웠다. 여자에게 자기 때문에라도 살아달라고 애원했다. 여자는 말한다. 이런 나를 계속 사랑할 수 있다고? 결국 당신은 지쳐서 날 떠날 거야. 그는 그렇지 않다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그랬던 남자였는데, 그녀가 없으면 살 수 없다던 그 남자가 몇년 후 그녀의 예언처럼 그녀에게 질려하고 연락을 피하고 그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우유부단하게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해 그녀가 그를 더 집착하게 만들다가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여자는 그의 결혼식을 망치러 가려다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가지 못했다. 그냥 돌아갈 수 없어 성당의 고해성사실에 가서 신부님 앞에서 그를 저주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결국 그가 너무 그리워서 그와의 추억에 조금이라도 더 기대고 싶어서 자주 함께 왔던 이 카페를 찾은 자신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순간 너덜너덜해진 케첩통을 보고 말았다. 텅 빈 영혼들이 서로 공명하는 순간이었다. 여자는 케첩통의 자본주의적 무미건조한 탄생과 7일간의 짧은 생, 따뜻한 손이 닿았을 때 찰나의 기쁨, 그 후 텅 빈 고독을 알아챘다. 너도 텅 비었구나. 배신으로 몸 안에 모든 온기가 빠진 여자와 이제 더 이상 케첩이 없는 케첩통이 서로의 결핍을 애도하며 죽음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 때, 여자에게 서빙하는 직원이 다가온다.

“죄송합니다, 새 것으로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캐첩통을 얼른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니, 케첩이 떨어졌으면 말로 하지, 울 게 뭐람. 진짜 이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