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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May 08. 2024

너는 지금도 창가 앞에 서 있을까

연락이 끊긴 친구

학창 시절의 ‘학창’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배움의 창가라는 뜻으로 공부하는 교실이나 학교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창’이 ‘창가’라는 뜻이었다니. 새삼스러웠다. 창가에 선 사람은 창 밖을 보는 사람이라면 굳이 배움의 공간에 ‘창’자를 쓴 것은 미숙한 존재인 학생들이 많이 배우고 성장해서 이곳이 아닌 창밖의 먼 세계를 바라보라는 뜻일까. 어쩌면 학창 시절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결국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지나가는 시절에 불과할까. 교실 창가 아래 둔 화분처럼 또는 어항 속 올챙이처럼 아이들은 하루하루 자랐다. 시간이 지나 화분에서는 강낭콩 열매가 달리거나 올챙이 몸에서는 네 다리가 모두 나와 개구리가 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그 시절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던 걸까.



수도권의 한 여자고등학교의 고등학교 2학년생들이 모인 한 교실. 그리고 그 교실 안의 그 여자 아이. 그 애의 이미지를 단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낸다면 1분단에 앉아 계속 창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국어 수업시간이었는데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딴 생각을 하느라 창밖을 멍하니 보는 것이 아니라 창밖 무언가에 홀린 모습이었다. 크고 예쁜 눈을 가진 아이였다. 대체 무엇이 그 아름다운 눈을 홀리게 한걸까.



어느 날 그 애가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자습시간에 국어책을 펴놓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애가 공부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가르쳐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정철의 ‘관동별곡’이었다.

“이게 막 옛날 말 써져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그래? 옛날 말이지만 소리 내서 읽어보면 지금 쓰는 말이랑 비슷한 부분들이 있어.”


그 애는 마침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결국 한 구절씩 천천히 해석을 해주었다.

“말이 어렵지만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돼. 이 글은 결국 글쓴이의 여행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이야기라서 그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보면 더 쉽게 다가올 거야.”

“야, 너 정말 설명 잘 하는구나!”

그 애는 감탄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랑 친하게 지내야겠다!!”



우리 반은 주기적으로 자리를 바꿨고, 그 애는 더 이상 1분단에 앉을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이번에 1분단에 앉게 된 나에게 이번 시간만 자리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물었다.

“왜?”

“차 체육시간이거든. 걔 봐야 해.”


차는 다른 반에 있는 그 애의 친구였다. 쉬는 시간에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을 자주 봤지만 밖에 나와 있는 모습을 챙겨봐야 할 정도로 죽고 못 사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 가끔 그 애가 창밖만 내다본 건 차를 보기 위해서였던 거다.


“그럼 차도 네가 체육 할 때 이렇게 봐?”

“아니, 걔는 안 그래.”

“근데 너는 왜 그래?”

“사랑하니까.”


그 애는 차를 친구 이상으로 사랑했다. 아니 우상처럼 사랑했다. 17살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는 정말 예뻤지만 차는 못생겼다. 차는 여자 아이치고 머리가 정말 컸는데, 그래서 운동장에서 금방 찾을 수 있다고 정말 귀엽지 않느냐, 면서 그 애는 꺄르륵 웃었다. 차는 공부를 잘해서 전교1,2등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차는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을 갈 텐데 함께 있으려면 자신도 어쨌든 서울에 있는 아무 대학이라도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곧 투덜거렸다.



차에 대한 애틋한 비밀을 털어놓은 날부터 그 애는 매일 차에 대해서 알려줬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차는 사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비슷한 아픔을 가진 자신에게 의지하다가 서로 사랑하게 됐다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차가 얼마나 위트 있고 매력적이고 이상하고 담대한지를 늘어놓았다.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 눈에도 차가 귀엽게 보이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심지어 후광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때 처음 알게 됐다.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 그 대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지. 자신을 다 내던지며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에, 차는 그 순간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 애의 활발함, 당당함, 낙천성, 여유로움은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그 애는 차가 자기를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늘 애달파했다. 차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특별한 사이로 소개하지 않거나 다른 친구들과 붙어 있을 때마다 속상해 하면서 내 앞에서 많이 울었다. 그때 또 알게 됐다. 사랑의 무게가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라는 걸. 하지만 그 마음은 도저히 끊어내고 싶어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이라는 것도.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 애는 자주 울었다. 왜 너는 가슴 아프고 힘든 사랑만 하는 건지. 이번에는 유부남이었다. 네가 묘사한 그 남자는 왠지 또 차랑 비슷했다. 머리가 크고 못 생겼지만 또 그게 귀엽다는 것까지. 와이프와 관계가 거의 끝났고 남자는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여자가 이혼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 남자는 자기를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네 사랑에 반기를 들었다.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장 그 남자랑 헤어져야 한다고 말렸다. 너도 안다고 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헤어졌지만 비를 맞고 처량하게 자기 집 앞에서 밤새 기다리는 남자를 다시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더 이상 네 울음을 달래줄 수 없었다. 심지어 도발했다. 도저히 네 사랑을 이해할 수 없으니, 그 남자랑 헤어지지 않으면 더 이상 너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용고시를 준비한다고 도서관에 있던 25살의 나는 너에게 진저리를 쳤다. 너는 눈썹을 우그러뜨리고 도서관 통창을 내려다봤다.




그때를 후회하고 있다. 공부 한다고 세상과의 창문을 닫고 도서관 좁은 책상에서만 살던 내가 너를 향한 창문마저 닫아버린 그때를. 심지어 너를 창밖으로 밀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런 모진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말은 네 사랑을 통째로 부정해버린 말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했던 건 사랑에 모든 걸 던지는 그 순수함이었고-때론 그 순수가 부럽기도 했는데 나는 그 마음을 져버렸다. 차를 사랑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너의 모든 삶의 원동력을,사랑을, 아니 청춘을, 아니 너의 삶을, 그렇게 부정했던 걸, 네가 완전히 내 삶에서 자취를 감춘 후에야, 후회했다.




창가에 앉아 조용히 너를 불러본다.  미진아, 나는 네가 여전히 이렇게 창가 앞에 앉아 있을 것 같구나. 다시 너를 만날 수 있다면 내 옆에 앉아 읽기조차 어려웠던 옛 문장을 한 문장 한 문장 읽듯이 우리 삶에 새겨졌던 난해한 문장들을 나지막이 소리 내 읽으면서 같이 해석하고 싶다. 우리가 그때 어지럽게 방황했던 건 항상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문장을 품고 끙끙 앓으면서 그 문장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 아닐까. 지금 창가에 선 네 시선이 더 이상 저곳이 아닌 이곳을 향했으면 좋겠어.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그 햇살이 만들어 낸 너의 그림자를 보며 슬쩍 미소 지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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