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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Jan 07. 2024

희경 언니에게

연말과 새해를 맞으며 서로를 위로할 수 있길

처음으로 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네. 우리 지난 크리스마스 때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주말에 감기몸살에 걸리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잖아. 한국에 팀홀튼이 생겼다고, 거긴 누가 뭐래도 언니랑 꼭 가야한다고 내가 먼저 만나자고 졸랐는데 말이야. 벤쿠버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캐나다 국민 카페 팀홀튼에는 한 번쯤 가봤을 거야. 우리가 같이 갔었나. 그런 일상적인 기억은 잘 나지 않아. 거의 20년 전이네. 하지만 각자 홈스테이에서 나와서 도심 중심에 있는 랍슨 거리 부근을 돌아다니며 함께 살 집을 구하고, 룸메이트로 살았던 기억은 여전히 우리를 묶어놓고 있어. 그 집의 구조와 방의 살림살이들은 여전히 생생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지난 새해 무렵이었던 것 같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만나면 어제 만난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어.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언니가 좋았어. 이유가 뭘까 곰곰이 곱씹어 보니 나랑 체구가 비슷해서 그랬던 것 같아. 나는 여자 중에서도 꽤 작은 편이었고, 그때는 겨우 40kg밖에 나가지 않았잖아. 내 주변에 나랑 비슷한 체구의 사람이 별로 없었어. 내 동생도 나보다 한뼘 더 컸거든. 언니를 보면서 아, 내가 다른 사람 눈에 저렇게 보이겠구나, 라는 걸 처음 깨달았지. 작은 얼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깡마른 몸, 작은 손과 발. 하지만 언니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깡다구가 있었던 사람이었지. 어학연수를 핑계로 공부는 뒷전이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언니는 꽤나 진지하게 공부했어. 비즈니스 수업에서 발표를 앞두고 밤새 책상 앞에 붙어 있던 모습. 침대에 누워서 그만하고 자라는 나를 등지고 앉아 언니는 밤새 공부를 했지. 주황색 불빛 아래 충실한 뒷모습이 왜 그렇게 아련하고 좋았는지.



작년에 만나서 우리는 젓가락질에 대해 얘기했지. 내가 젓가락을 엑스자 모양으로 잡잖아. 언니도 나랑 똑같았는데, 결국 고쳤어. 결혼하기 전에 상견례를 할 때 도련님 될 사람이 젓가락질 얘기를 했다지.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고쳤다고. 아이가 젓가락질을 이상하게 배우면 안 되니까. 나는 여전히 고칠 필요가 없다, 젓가락을 어떻게 잡든 반찬만 잘 집어 먹으면 된다고 시큰둥했지. 그러자 언니는 발가락으로도 젓가락을 잡는 사람이 있다며 영상을 보여줬어. 영상 속 이범식 씨는 22살에 전기공사를 하다가 감전 사고를 당해 두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었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았어. 남은 왼쪽 다리의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연습했지. 6개월 동안 연습해서 드디어 원하는 반찬을 떠먹을 수 있을 때, 그는 희망을 봤다고 해. 그때부터 발가락으로 글씨도 쓰고, 컴퓨터 타자도 쳐서 대학도 졸업했어.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도 한대. 언니는 젓가락질도 연습만 하면 할 수 있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해줬지. 나는 조금 움찔했어.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내 젓가락질을 유심히 관찰하더라. “그렇네. 손가락 힘을 제대로 못 쓰네. 불필요한 데 힘을 주고 있어.” 그는 내가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손가락 힘을 쓴다면서 젓가락질의 무게 중심에 대해 한참을 설명해줬어. 몇 번 그가 알려준 대로 연습을 했는데 결국 손끝에 제대로 힘을 주는 방식을 터득하지 못했어. 그런데 힘주기의 문제는 비단 젓가락질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아. 지난해 내내 제대로 힘줄 곳에는 힘을 못 쓰고, 힘을 빼도 될 곳에는 힘을 준 것 같아. 조직 생활이 맞지 않다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일을 너무 열심히 했고, 도리어 더 성장시키고 싶었던 작가로서의 커리어는 멈춰버렸어. 계속 직장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거기에 더 꽁꽁 묶이는 기분으로 살았어. 그래서인지 내 나이에 보기 좋게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회사를 나온 언니가 부러웠어. 나는 왜 이렇게 야물지 못할까, 자책했지.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 얻은 이 자책은 다행히 김미경 선생님의 말에 조금은 회복이 됐어. 인생이 자기 생각과 달리 흘러갈 때. 내 삶이 오직 나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배우자, 자식, 부모, 형제가 얽혀있을 때. 그래서 나에게 부여된 책임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이었어. 가족을 저버리고 커리어에 집중하는 선택이 있고, 반대로 일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선택이 있어. 그녀는 이럴 때 필요한 지혜로 ‘적극적 순응’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아이를 낳고 양육해야 하는 시간, 늙은 부모를 돌봐야 하는 순간, 가족 중 누군가가 아파서 돌봄이 필요한 순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접고,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에 투신해야 하는 순간. 그때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운명의 굴레 앞에 ‘적극적’으로 순응했을 뿐이래. 의무와 도리를 위해 나를 희생한 게 아니고, 인생의 주체적으로 살아낸 주인공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스스로를 변명만 늘어놓는 희생자에 가두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계속 칼날을 벼리는 주인공으로 살라는 메시지였어.



그때 난 언니를 떠올렸던 것 같아. 퇴사하겠다는 언니를 회사에서 잡았잖아. 몇 년만 더 일하면 퇴직금을 몇억을 더 받을 수 있다고. 그런데도 언니는 과감하게 그만뒀어. 그럼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걸 못 볼거라면서.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지만, 그 시간만큼은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거라고 말했지. 그 말을 할 때 언니의 등은 꼿꼿하게 바로 섰던 것 같아.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태도. 나는 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을 그 아이를 떠올렸어. 개구쟁이 표정을 가진 아이였지. 그 아이는 언니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겠지. 세상에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줄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참 든든해지잖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마음은 매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를거야.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담은 언니의 마음은 매일 가득 차서 텅 빌 수가 없겠지. 그래서 언니의 지금을 마음껏 응원하고 싶어.



우리는 20대의 잠깐 한 시절을 같이 보내고 그 후 더 오랜 시간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내 마음은 언니라는 언덕에 기대고 있어. 젊은 날 우리를 아프게 했던 이별의 아픔을 서로 위로했고, 첫 직장에서 지방 근무 발령을 받아 광주까지 내려간 언니의 숙소를 찾아가 첫 직장생활의 고달픔을 나눴고, 각자의 결혼식을 찾아 축하해주고, 운전면허를 갓 딴 언니의 차 옆자리에 타서 목숨을 내놓고(?) 운전 연수를 봐주기도 했지. 내 첫 책을 주변에 가장 많이 홍보해준 것도 언니였어. 우린 서로 알지 못하는 모습도 많겠지만 어쩌면 남들이 모르는 내밀한 모습을 알고 있는 사이 아닐까. 언니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조잘대고 싶었는데, 만나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편지로 먼저 전할게. 조만간 다시 날 잡고 팀홀튼에 가자. 20대의 그곳에서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20년이 흘러 다시 만난 추억의 장소에서 마주 앉아 서로를 조용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응원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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