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의 재해석
얼마 전 내가 일하는 부서에서 기획전시를 열었다. ‘리마인드 강남전’. 대도시로 성장한 강남의 100년사(왜 100년인지는 따지지 말자...부서의 대빵인 실장님이 정했으므로 자연스럽게 100년을 만들어야 한다)를 되짚는 전시였다. 소달구지가 다녔던 농촌마을이 외제차가 활보하는 대도시로 성장한 과정을 담은 전시다. 이 전시는 예전 서울역사발물관에서 개최한 기획물 일부인데, 전시를 보고 온 실장님이 이 전시에 꽂혀서 우리 (달리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회사(?)인 구청으로 가져오고 싶어했고, 결국 우리팀 옆팀, 홍보팀에서 공들여 성사시켰다.
학교와 구민들의 소장품까지 후원받아 차곡차곡 전시를 준비하던 홍보팀에 한 가지 난제가 발생했다. 이른바 ‘전시를 열며’이라는 제목을 단 글, 즉 전시 소개를 써야 하는데 하늘 같은 실장님의 어심御心을 간파하며 쓰는 게 여간 골치 아팠던 것이다. 보고서를 비롯한 모든 문서의 임팩트 강한 제목에도 자주 꽂히는 실장님은 몇날며칠 전시 콘셉트를 고민고민하다가 어느 날 자택의 안마의자에 앉아 쉬던 중 불현듯, 순식간에, 운명처럼 ‘온고지신’이란 단어가 떠올라 버렸고,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라 여겨 ‘당장 이 콘셉트로 진행해!’(이경영 말투?)라고 내지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온고지신...이거 솔직히 정말 고리타분한 단어 아닌가. 홍보팀에서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봤지만 진전이 없자, 급기야 홍보팀장이 고충을 호소했고, 나의 직속 상사인 언론팀장이 그런 일이라면 우리 팀에 적임자가 있다면서 결국 이 일이 나에게까지 오게 됐다. (아, 이것도 왜인지는 묻지 말자... 우리 팀장님은 우리 팀이 뭐든 제일 잘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냥 해야 했다)
나는 실장님이 과거 팀장이었던 시절부터 함께 일했었다. 무언가에 자주 꽂히는 그녀의 열정이 삶과 일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고, 실장님 역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나를 믿고 있었다. 그러니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어떻게든 소생시켜야 했다. 옛것을 익혀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앎. 강남의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그린다는 의도인 건 알겠지만, 이렇게 단조롭게 써가면 바로 빠꾸(전문용어다!) 맞을 게 뻔했다. 머리를 싸매고 국어사전의 4글자를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따뜻할 온溫자를 썼지? 다른 글자로 많았을 텐데. ‘온’이 회상하다, 보다, 공부하다로 쓰인 용례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따뜻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건데, 공자님은 왜 굳이 이 단어를 썼을까. 공자님은 혹시 화로 앞에 앉아 불멍하면서 야식을 데우면서 지난날을 곱씹어 본걸까. 현대인이라면 화로 대신 가스레인지나 보일러가 필요하겠군. 안 돼. 정신 차려. 진지해져야해.
<전시를 열며>
리마인드 강남은 강남의 옛 시간을 돌아보는 기획전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바쁜 시대에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전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온고지신’溫故知新에서 찾고자 합니다.
온고溫故,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굳이 따뜻하다, 익히다라는 뜻의 온溫이라는 글자를 쓴 의미를 짚어 봅니다. 무언가를 따뜻하게 익힐 때 시간을 들이듯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천천히 공들여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곰곰이 되짚는 일은 현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논밭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강남에는 1970년대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강북의 이름난 중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옮기면서 강남 8학군으로 불리는 교육1번지로 성장합니다. 교통과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이끄는 도시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미래를 선도하는 스마트 도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층층이 쌓인 시간을 천천히 거닐며 살아있는 강남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전시입니다. 아울러 강남의 극적인 성장 과정을 돌아보며 미래 발전에 대한 자신감을 얻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강남의 정체성은 강남 사람이 살아온 역사일 것입니다. 강남 토박이들이 지금껏 간직한 소장품은 그 시간의 향취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100년 역사를 간직한 학교에서 고이 보관한 소장품, 구민들이 손수 내주신 손때 묻은 물건에서 뭉클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옛것에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온기’가 있기에 온고지신의 ‘온’을 쓰지 않았을까요. 여러분도 이 전시에서 그 다정한 온기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온고지신의 온기를 살려서 쓴 글이 다행히 실장님 마음을 훈훈하게 데우는 데 성공했다. 휴, 오늘 하루도 이렇게 위기를 간신히 넘겼구나. 치열했던 일과를 끝내고 퇴근하는 길. 하루종일 붙잡고 있던 ‘온고지신’이 내 안에서 어른거렸다. 그리곤 미션을 마쳤는데도 가끔씩 그 단어가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며칠전부턴 과거의 한 장면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집 앞 카페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나. 왜 하필 이 모습이지. 문득 떠오른 과거의 내가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다.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니 요새 ‘사랑에 관한 오해’라는 책을 읽어서 그런 것 같다. 이번 글쓰기 모임의 책인데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하는 잘못된 생각을 꼬집어 주는 책이다. 모임이 아니라면 읽다가 중간에 덮었을 것이다. 사랑에 서툴렀던 과거의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남성편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20대의 내 옆에 항상 남자친구가 있었다. 누군가는 예쁘고 매력 있었으니까 애인이 많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스스로 개성이나 매력이 너무 없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매달리면서 그들과 나를 동일시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랑이 내 초라함을 구원해줄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쁜 관계를 참고 견디다가 이 사람이 소울메이트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되면 곧 다른 사랑을 꿈꿨다.
그날도 카페에 앉아 눈물을 삼킨 건 내 마음을 몰라주는 남자친구 때문에 서러워서였다. 지금은 마음이 상한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매사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고 때론 깜짝 놀랄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었으니, 아마 나와 시간을 더 보내주지 않았거나 내 기대를 무너뜨리는 말과 행동에 마음이 상했을거다. 이유가 뭐였든 내쫒기는 마음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리곤 도피하고 싶어서 책을 샀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내 비참한 마음을 외면하기엔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문제집을 주로 파는 작은 동네 서점에 들어가서 그림이 많은 책을 한 권 사서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책은 올드독 작가의 ‘개를 그리다’였다.
그렇다. 나는 책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반려견 소리와 풋코와 사는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 애틋해서 뭉클했는데 마지막에 소리에게 뇌종양이 생기고 하늘나라로 떠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더 슬퍼졌다. 한참 울고 나니 책이 슬픈 건지 내가 슬픈 건지, 글쓴이가 나 같고 내가 글쓴이 같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문득 이 책에는 지금 내 마음을 입혀 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펜을 들어 책의 빈 공간에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내가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할까...그래도 좋은 점도 많잖아...이제 누군가랑 헤어지는 건 싫은데...이 사람이랑 계속 함께 할 수 있을까...나는 답 없는 의문과 불안을 써내려갔다.
그 책의 빈 공간에는 “개를 키우면, 개를 그리게 된다”는 한 문장이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오래 곁에 두면 결국 그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내 바깥에 있던 이야기가 내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 그 때 내 손에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탐독했던 소위 독서광은 아니었지만 무난하게 책을 읽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독가多讀家는 아니지만 애서가愛書家라는 것을 깨닫자 나의 일부분이 책의 질감과 두께와 문장으로 만들어 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재에 꽂힌 색바랜 누런 종이와 책 귀퉁이에 얇게 쌓인 회색 먼지와 한쪽 귀퉁이를 접은 선까지. 모두 나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는 순간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울음을 그치고 이상하게 힘이 생겼다. 애인이 없어도 어쩌면 책에 기대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알 수 없는 용기 같은 것이랄까. 책은 초라한 마음을 잊는 도피처가 아니라 영원히 기댈 수 있는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었을까. 실체를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종류의 힘이었다. 왠지 두 볼이 살짝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버려진 종이처럼 구겨진 마음에 손을 내밀어줄 문장이 있다면.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은 나처럼 궁핍한 마음을 채워넣기 위해 책 빈 공간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의 병든 마음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을까. 그가 쓴 문장은 어떻게 내 나약한 마음을 바로 세워줄까.
자연스럽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을 때쯤 내 연애도 순탄해졌다. 좋아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점점 당당해지고 단단해지는 것 같다. 영화 기생충에 ‘시험은 기세’라는 대사를 따라서 ‘연애도 기세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나를 굽히는 연애만 하다가 내 자신이 더 중요한 관계를 맺자 (누군가는 이걸 ‘기세’라기 보다 ‘기가 쎄다’ 또는 ‘기쎈 여자’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애인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놀랍게도 더 행복해졌다. 내 중심에 서서 보니 남자친구의 단점보다 장점을 더 보이고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나를 아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 기세를 몰아붙여 청혼도 내가 했지만. (이건 좀 내 기세를 눌렀어야 했나)
과거의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며 어수룩하고 낯선 나와 화해하면서 앞으로 내가 가야할 방향이 무언인지 분명해졌다. 나는 나를 닮은 글을 쓰고 책을 마음껏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것이다. 그래서 좀 올드하지만 글쓰기 모임에서 ‘문우’文友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나누다 보니 절로 사랑의 마음이 싹트고 자연스레 진짜 커플들(!)도 탄생하는 마법 같은 곳이다. 나보다 나이는 조금 어린 사람들이지만 마음은 훨씬 어른스러운 사람들이라 배워가는 게 더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쩜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말하고 이토록 솔직하고 이리도 빛날 수 있지. 볼 때마다 감탄하다. 언젠가 이 시간도 흘러 과거가 되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순간을 회상할 때면 따뜻한 온기를 더해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