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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나 Oct 29. 2020

기억난다.


초등학교 도서실에서 어린이 국어사전 하나 집어 들고 ㄱ부터 천천히 살펴가며 아는 단어를 살펴보고 모르는 단어는 읽어보았다. 왜 도서실에 갔는지, 왜 사전을 집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햇볕이 살짝 비치는 칸막이 자리에서 한 손에 잘 쥐어지는 초록색 표지의 작은 어린이 국어사전을 펼쳐서는 찬찬히 살펴보며 낱말을 헤아려보았다. 자음과 모음의 순서를 유심히 보았다. 어떻게 발음하는지 [000] 이 부분을 소리 나는 대로 읽어보면서 발음할 때는 이렇게 하는구나 알게 되었다. 그 후에 언젠가 아빠가 서점에서 국어사전 큰 것을 사게 해 주었다.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린이 국어사전과는 다르게 차라락 넘어가는 얇디얇은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조금이라도 험하게 다루면 찢어질라 조심조심 보았다. 표시해두고 싶은 단어에 밑줄을 그으니 뒷장에서 고스란히 비쳐서 아주 작게 연필로만 그었다. 궁금한 낱말이 있으면 찾아보고 그 단어 앞뒤로도 살펴보며 발음이나 사용된 한자를 살펴보았다. 특히나 욕을 찾아보았다. 지랄은 뭔지 염병은 뭔지 병신, 새끼, 년 등등 엄마와 아빠에게 배운 욕들을 찾아보며 아 그렇구나 했다.

아빠와 함께 옥편 찾는 법도 익혔다. 천자문 책과 명심보감 책을 가지고 와서 어려운 한자들을 찾아보았다. 부수로 찾는 법, 전체 획수로 찾는 법, 음으로 찾는 법 등을 알아봤다. 부수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같은 부수여도 모양이 다른 것들도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5학년까지 2년 동안 집 근처 시장통 골목에 있는 백산서당에 다녔다. 한자학원이지만 서당처럼 해놓은 곳이다. 서당이 뭔지 잘은 모르지만 진짜 서당 같은 느낌이긴 했다. 2층 건물에 1층은 서당, 2층은 주택이었다. 옆으로 여는 여닫이문을 열면 드르르륵 소리가 나는 고깃집 같은 데서 사용되는 가벼운 문이었다. 유리로 된 부분은 흰 종이를 틈이 안 보이게 꼭꼭 메워놓았고 크고 힘 있는 한자체로 백산서당,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논어, 맹자, 대학 등이 적혀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 학생들이 제각각 자기 범위에 해당하는 천자문이나 명심보감 소학 논어 맹자 등을 읊고 있었다. 특유의 멜로디로 목청껏 소리 내어 왼다. 이 멜로디가 참으로 낯설었는데 외면 욀수록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이 더 외우기 편했다. 서당은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나는 주로 왼쪽 칸에서 한자를 배웠다. 왼쪽 칸에는 훈장님 방이 작게 따로 있었다. 훈장님은 항상 흰색 한복(?)에 감투(?)를 쓰고 있었다. 오른쪽 칸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 왼쪽 훈장님 보다는 젊은, 당시 나의 아빠 벌 되는 작은 훈장님이 계셨고 그 훈장님은 감투는 쓰지 않고 개량한복을 입고 계셨다. 눈이 부리부리했고 작지만 둥그렇기도 하고 다부지기도 한 체형이셨다.

서당 공부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냥 하교 후 매일 가서 그날의 분량을 공부하고 오면 됐다. 일련의 과정이 어떤 순서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보통 이랬던 것 같다.

우선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는다. 가방에서 교재와 먹과 붓을 꺼내고, 서당 한편에 있는 신문지, 벼루, 물통, 화선지를 챙겨 온다. 벼루에 물을 조금을 붓고 먹을 간다. 투명한 물에 먹이 들면 딱딱하게 굳은 붓을 먹물에 적셔준다. 준비됐다. 신문지에 한자를 바르게 쓰는(?) 그리는(?)  걸 연습하고 마지막은 화선지에 한다. 훈장님께 보여드리면 통과 혹은 불통 결정이 나고 혼나거나 칭찬은 별로 없고 무미건조한 조언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범위로 진도를 나간다. 붓글씨 하는 걸 정리하고 나서 교재와 한자 공책과 연필 지우개를 꺼낸다. 그리고는 감투 쓴 훈장님을 본다. 그럼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훈장님 방은 문이 닫혀있던 적이 없다. 문이 아예 없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훈장님 책상 앞에 서서 훈장님이 그날의 한자를 내 공책에 써주시고 훈 음을 듣는다. 그리고 나면 다시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와 새로 배운 한자를 익힌다. 한 바닥 정도는 채웠던 것 같다. 아참, 그러고 보니 천자분은 감투 훈장님께, 명심보감은 개량한복 훈장님께 공부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명심보감은 문장들로 되어있고 메시지가 있어서 그저 외우기에 급급했던 천자문보다는 더 자세히 배웠던 것 같다.

이제 낭독(?)의 시간이다. 도떼기 시장 같은 분위기라 내 목소리를 작게 내면 훈장님에게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음을 어필할 수 없다. 그리고 검사받을 때 외운 걸 들려줘야 하기에 제대로 외우려면 목소리를 크게 해야 덜 헷갈린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 집 우 집 중 넓을 홍 거칠 황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 한 숨에 외우다가 숨이 찬다 싶으면 끝을 길-게 빼서 쉬어간다. 날일 달월 찰영 기울 츠으으으으으으윽 . 하고 말이다. 명심보감을 외울 때는 더 신기하다. 이게 아무래도 문장으로 되어있다 보니까, 특이하다. 단조라고 해야 하나? 마이너 같은 코드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음정을 넣어서 00은 0000하고 0000이며——, 00은 0000이고 0000이니라———, 0000이어든 0000하고 0000이거든 0000함이니라——- 하고 읊어야 했다. 오늘 배운 내용을 익히고 처음부터 오늘 배운 내용까지 복리식으로(?) 외워야 한다. 그리고 꾀부리면 제대로 시험처럼 검사를 받아야 하고 목청껏 읊고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드리면 검사는 대충 한자의 훈음을 다 외웠는지 체크하는 정도로 끝난다.

서당 가방은 흰색 가로로 긴 손잡이가 달린 실내화 가방처럼 생겼었다. 그 가방을 다시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반동을 이용해서 한 손에서 벗어난 가방을 다른 손으로 잡고 다시 다른 손으로 넘기며 집으로 간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랑 아빠랑 도영이가 아랫목에서 두꺼운 목화솜이불을 덮고 땅콩이나 밤, 호두 같은 것을 까먹고 있고 엄마는 춥다고 언능 들어오라며 호들갑이다. 꽁꽁 언 내 손을 자신의 허벅다리 밑에 넣어주고는 입에 주전부리를 넣어준다.

이 기억 또한 편집되고 과장된 기억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써놓고 나니까, 추워지는 가을밤 그때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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