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인가 자취할 때였다.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잡아서 3명이서 함께 사는 곳이었다. 집은 좁았다. 거의 잠만 자는 정도였다. 대신에 사랑방처럼 들른 곳이 있는데 친구들 네 명인가 다섯 명이 자취하는 곳이었다. 내 자취방에서 걸어서 10-15분 걸리는 곳이다. 내 룸메보다는 그 자취방 친구들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 요리 잘하는 순천 친구가 있어서 더 좋았다. 게다가 그 집엔 작지만 티비도 있었다. 웃찾사 하는 날은 꼭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수다 떨다가 웃찾사를 보고 나 혼자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보통 새벽 1시가 넘어서 2시 즘에 건너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날도 어김없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웃찾사를 보고, 친구와 더 얘기하고, 눈을 반쯤 감고는 골목을 누비며 흥얼흥얼 흔들흔들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골목이기에 무섭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며 약간 잠에 취해서 걷고 있었다. 내 자취방이 바로 코앞에 보일 무렵이었다. 오른편에는 건물이 있고 더 걸어가면 주차공간이 있고 더 걸어가면 내 자취방 건물이 있다. 나는 내 자취방 건물과 옆 건물 사이의 주차공간을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췄다. 잠에 취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자취방 건물 외벽에 검은색 현수막 같은 게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혼자 중얼거렸다. 저게 뭐야.. 눈을 비비고 꿈뻑꿈뻑 보았다. 슥 스쳐서 보지 않고 멈춰 서서 보았다. 카메라의 조리개가 초점을 맞추기까지 시간이 약간 필요한 것처럼 내 졸린 눈이 어둠 속에서 물체를 확인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저게 뭐지. 하고 한참을 봤는데 슥. 그 물체가 움직였다. 그 순간 알았다. 그건 사람이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검은 물체는 도시가스 배관을 타고 벽에 찰싹 달라붙어서 2층 화장실 창문을 보고 있던 것이다. 내가 있는 골목 방향이 아니라 건물 뒤편으로 그 검은 물체가 한 걸음 옮길 때 알아차렸다. 나쁜 새끼. 나는 냅다 소리 질렀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검은 물체는 잠깐 멈칫했다. 나는 더 소리를 높였다.
지금 거기서 뭐하시는 거냐구요! 네? 뭐 하는 거예요?
나는 잡았다 요놈 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은 물체는 다시 건물 뒤편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온정신이 번쩍 깼고 분노가 일었다. 그때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 새끼가 내려와서 나한테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지. 나는 그건 무서웠다. 건물 뒤편으로 사라질 무렵 그 새끼가 쫓아올까 봐 냅다 자취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거렸다. 손이 벌벌 떨렸다. 들어오자마자 화장실 불이 켜져 있는지 봤는데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우리 집은 아니었다. 룸메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들 자려고 누워있던 차에 나 때문에 잠을 깼다. 나는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차공간 외벽에 화장실 창문이 나 있는 곳은 옆집이었다. 다음날 낮에 노크를 하고 그날 밤 내가 본 것을 말해주었다. 반응은 좀 의외였다. 무서워할 줄 알았고 내게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뭐 그런 일로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냐는 표정이었다. 아. 네. 네. 이 말만 들었다. 친구들은 다들 유한나 겁도 없다고 거기서 소리를 지르면 어떡하냐고 했다. 그치만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음날에라도 왜 경찰서에 신고해서 순찰을 강화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신고할 생각조차 못 했다.
어린이집 근무를 마치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둑어둑했던 걸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니 어두웠다. 칼퇴를 했다면 가을 겨울 즘이었을 것이고, 밀린 업무를 하고 퇴근한 거라면 봄 여름도 가능하다. 마을버스에서 내려서 5-10분 정도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면 우리 집이 나온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바로 잠그는 버릇이 있는 나는 바로 잠갔다. 집에 아빠가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일찍 왔네?
어 그래 왔냐? 아빠 나가야 돼.
어디 갔다오시게?
아빠는 작업복이 아닌 외출복으로 갈아입으시는 중이었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불투명 창문을 닫고 불을 켰다. 우리 집은 반지하이고, 내 방 창은 골목길에 나 있었다. 밖이 어둑해지면 방 불은 절대로 창 열린 상태로 열면 안 된다. 밖에서 너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가방을 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요? 에?
통화를 하는 건가 싶었다. 약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말투였다. 옷 갈아입고 나가서는 아빠에게 물었다.
뭐야? 아빠 아직 안 나갔네? 누구랑 통화했어?
나갈라고 문 여니까 어떤 남자 새끼가 하나 서 있네? 누구냐고 물이 뭐, 준성이네? 아니냐고 물어보네. 아니라고 했더니 아~ 이러면서 가더라?
... 이상했다. 용건이 있으면 노크라도 했을 텐데 아빠가 문 열 때까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그리고 우리 집은 반지하였고 반지하에는 우리 집뿐이다.
만약 집에 아빠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나에게 현관을 닫자마자 바로 문을 잠그는 습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살면서 밤길을 혼자 다녀도 별로 겁을 먹어본 적이 없다. 이때 이후론 달라졌다. 여자 혼자 밤길 다니면 위험하다는 말이 그 후로는 실체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걸어 다니면서 이어폰은 꽂지 않는다. 특히 퇴근할 때마다는 주변을 경계하며 다닌다. 괜히 겁나면 통화를 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일 말고도 몇 번 더 있다. 사람 많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은 술 취한 아저씨가 나에게 고성을 지르고, 내가 자리를 뜨려고 하니 내 가방을 잡고 끌어다가 다시 자리에 앉혀서 자기의 고성을 듣게 한 일, 서울역 환승 구간에서 요리조리 사람을 피해 가며 잰걸음으로 달리고 있는데 맞은편 백발의 할아버지가 주먹을 슈퍼맨처럼 하고 있고 내가 그 옆을 지나갈 때 팔 방향을 나에게 바꿔서 나의 턱주가리와 그 아저씨의 주먹이 충돌해서 내가 비명을 지른 일, 이수역 여자 화장실 맞은편에서 나왔는데 바바리맨을 봤고 무서워서 얼른 시선을 피했더니 내 뒤통수에 대고 기분 나쁘다며 욕설을 내리꽂아 두려움과 불쾌가 한꺼번에 찾아온 일 등 말이다.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이젠 무서워한다. 이전엔 별로 안 그랬는데... 가끔은 겁 없이 활보하던 그때의 내가 그리워진다. 술 취한 아저씨를 보고 아빠를 떠올리며 아이구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면~ 하면서 짠한 마음을 품었던 때가 그리워진다. 사람이 있는 공간이 제일 무섭다. 사람이 무서운 거다. 골목길에서 걸을 때 앞서가는 여자가 자신을 경계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자신이 이상한 사람도 아닌데 여자가 그냥 안 탄다고 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억울하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남녀의 온도차가 너무 크다는 걸 느낀다. 이렇게나 다르구나. 하고 말이다. 여자로 산다는 건 이 정도의 일쯤은 기본값으로 여기고 산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이지 않고 죽임 당하지도 않고서.
이 노랫말이 심상치 않다.
아 무용담처럼 나 이런 일도 있었어! 대박이지! 무섭지! 라고 쓰려고 했는데 마무리가 씁쓸해졌다.
20.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