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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나 Oct 30. 2020

동생과의 통화


동생 도영이에게 전화가 왔다. 도영이는 지금 순천 근처 광양에서 일을 하고 있다. 자칭 ‘노가다 김 씨’라는 도영이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넣고 있었다. 7월에 광양에 내려가서 이제까지 일 했는데 곧 급여를 받게 되면 천만 원을 번 것이라고 한다. 천만 원을 벌어서 자랑을 하고 싶은데 자랑할 데가 없어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나는 엄청 고생했다고 치켜세워주었다. 아빠처럼은 절대로 일만 하면서 고생하진 않을 거라고 했던 도영이가, 아빠처럼 노가다를 하면서, 수당이 더 붙으니 야근도 하고, 주말근무를 꿀이라고 생각하며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힘들 걸 각오하고 이런(?) 일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 켠이 시리다.


나에게 전화를 걸기 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아들이 돈을 벌었다고, 찬물로 씻고 여름엔 에어컨, 지금은 보일러도 없는 곳에서 외노자보다 더 열악한 숙소에서 일하며 이만큼 벌었다고 말했더니 엄마는 돈 벌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다. 다 그러면서 돈 번다. 라고 했다 한다. 아휴. 내가 다 속상하다. 지난번에 팀장이라는 사람이 월 천만 원 넘게 벌어가면서도 일하는 사람들 숙소에 등유를 넣어주지 않아서 찬물로 씻는다는 말을 들었었다. 도영이는 이러다 뼈 삭겠다 싶어서 등유 20리터를 사려고 보니 고작 4만 원 돈 하더란다. 20 리터면 두 달은 씻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근데 다른 사람들이 팀장 버릇 나빠진다고 사지 말라고 해서 못 샀다고 한다. 너무 화가 나서 팀장 욕을 아주 실컷 했다. 돈을 그렇게 많이 벌면 뭐하나. 사람을 사람처럼 대해주지 않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악착같이 모으고 안 쓰는구나 싶기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영이랑 예전에 통화할 때 3일에 한 번은 따뜻한 물로 샤워하게 해 준다는 말로 들었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거였다. 군대에서도 3일에 한 번은 온수 샤워가 되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는 뜻이었단다. 그러니까 계속 찬물로 씻고 찬 바닥에서 자고 있다. 그렇게 고생하며 번 돈이라 자랑을 하고 싶었단다. 이만하면 그래도 대단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 싶었을 거다. 돌아오는 엄마의 대답이 다 그렇게 산다니. 남의 돈 벌어먹고 살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느냐니. 엄마는 아들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 왜 정작 도영이가 고플 때 따숩게 말해주지 않을까. 야속했다.


어제가 아빠 생일이었다. 내가 생일 전날에도 전화 드리고, 생일에도 전화드리면서 축하한다고, 못 찾아봬서 죄송하다고 조만간 서울 올라가겠다고 하고 통화를 했었다. 도영이는 아빠에게 전화해서 돈 부쳤다고 하고, 아빠가 왜 부쳤냐고 물으니, 겸사겸사 생일도 있고 해서 보내드린다고 답했다고 했다. 그때 아빠가 ‘아빠 생일이었냐? 응 고맙다.’라고 했단다. 나랑 통화할 땐 축하받아놓고 왜 도영이와 통화할 땐 생일인걸 모르는 척했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아빠다. 도영이 말로는 아빠가 능구렁이 같은 구석이 있단다. 노가다 판에서 좀 굴러보니, 아빠 같은 캐릭터가 있다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몰라도 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보인단다.


코로나 터지기 전 도영이는 다른 나라에 있었다. 워낙 여기저기 있어서 터지기 전에 어느 나라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남아 어디였던 것 같다. 거기서 다이버 강사로 소소하게 벌고 소소하게 즐기며 지냈다. 요로결석 때문에 급히 한국으로 들어와서 치료를 받고 나갈 때쯤 코로나가 터진 거다. 코로나가 장기화되어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던 잠수기능사에 도전하기로 하고 공부를 했다. 실기 시험을 앞두고는 확진자 수가 급증해서 무기한 연장되었다. 최근에 1단계로 낮춰졌으니 이제 시험 다시 일정 잡히지 않았냐고 물으니 내년 3월 즘 생각한다고 한다. 다른 실기 시험에 비해서 장비를 입에 물고 하다 보니 좀 더 까다롭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한다.


도영이가 돈을 버는 이유는 또 다른 나라로 가서 지내려고 그러는 거다. 몇 번 그래 왔다. 한국에 들어와서 공장이나 공사장 같은 곳에서 바짝 일해서 돈을 벌고 어느 정도 모아지면 또 나가서 지냈다. 다이버 강사로 버는 수입이 넉넉지 않아서 돈 떨어지면 들어오고 모아서 나가고 그랬다. 아빠나 엄마는 탐탁지 않아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젊음이 지속되지는 않을 거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직장에 다니지 않으니 그냥 놀고먹는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결혼 생각 없는 도영이는,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정말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아온 도영이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 엄마 아빠의 세계와 도영이의 세계는 참 다르다.


지금도 도영이는 아빠한테 큰 소리를 치고 싶어 한다. 도영이가 울며 겨자 먹기로 노가다에 들어가서 하루 일당 10만 원 즘 벌 때 아빠는 약 올리면서 내가 있는 현장에서 쓰레기 줍고 다니는 사람들도 12만 원 받는데 고작 그거 받을 거면 뭐하러 일하냐고 그랬단다. 얄궂다 정말. 지금 자기가 버는 돈도 아빠 일당에 비하면 작단다. 일당이 비슷하다 해도 아빠는 5시면 퇴근이지만 자기는 밤 9시가 되어야 퇴근이라고. 잠수기능사를 따서 일하면 같은 시간 일해도 아빠가 버는 것보다 많이 벌 수 있다며, 그때는 정말 아빠 앞에서 얘기해주고 싶단다. 경력 40년이나 돼서 일당 그거밖에 못 받느냐고. 너스레를 떨며 대놓고 말은 못 할 테고 그래서도 안되는데, 그땐 누나한테 전화해서 못할 소리 좀 해보고 싶단다. 기꺼이 들어주겠노라고, 아빠 못됐다고, 어째 아들내미 고생하는 거 누구보다 알면서 그리 말할까, 너무했다고 대신 흉봐주었다.


도영이는 목소리가 추위에 잠겨 성대마저 얼어붙은 것 마냥 덜덜 떨렸다. 반바지 차림으로 맥주 한 캔 사러 편의점 가는 길이란다. 추석 때 서울 집에서 내려오면서 귀찮아서 긴바지 안 챙겨 왔고, 돈이 아까워서 옷을 사 입기 싫다고 했다. 아휴... 속 터지게 또 그런 건 아빠 닮았다. 숙소가 참 외져서 편의점까지 가려면 20분은 걸어야 한단다. 통화를 하다 보니 더 추워져서 아무래도 소주를 사 가야겠다면서, 주말에 볼 수 있음 보자고 곧 연락하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노동자의 삶에도 예수님이 함께 계실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돈을 벌기 위해 생을 갈아 넣는 인생에도 주님이 함께 계실까. 자유로운 영혼까지 소멸시켜가며 한 사람 유도영이 아닌 ‘노가다 김 씨’가 되어버린 그 비릿한 숨결에도 주님이 찾아가 주실까. 어린이집 근무가 너무 어려워서 버거워서 밤마다 아침마다 울며 출근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미치도록 도망치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도망쳤던 그때 말이다. 순간순간 주님을 불러봤지만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던 그때. 도영인 나보다 강하다. 그래서 이만큼 버티는 것 같다. 그래도, 주님이 계셔주셨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순수하게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던 그 도영이가 지금은 피폐해져 찌들었어도 중심을 구멍 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셨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불쌍히 여기셔서 도영이와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지지해주는 남편이 있고 이쁜 딸내미가 있고 따뜻하다 못해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따수운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며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위선이 따로 없는 것만 같다. 땀에 절은 돈으로 조카 은설이에게 하리보를 사주겠다던 도영이 삼촌을 보자니 술에 취해서 우리 집에 와서 각가지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 오며 술 한잔 더 하고 가시던 종수 삼촌이 생각난다. 혼자 사는 집으로 쓸쓸히 빈손으로 돌아가던 삼촌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도영이는 삼촌보다 덜 외롭고 더 많이 웃고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2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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