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리만치 나를 전부로 아는 이 녀석이 감동이다. 성시경의 노래 제목처럼 말이다. 오늘은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지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대면서 경쟁이라도 하듯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가 더 큰 숫자를 내보이니 그러지 말라고 하는 은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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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 엄마 나보다 더 큰 숫자 말하지 마. 그럼 내가 작게 사랑하는 거잖아.
나: 왜- 엄마가 더 사랑하면 은설이가 더 많이 사랑받으니까 좋잖아. 더 사랑해주고 싶은데.
은설: 그치만 엄마가 조금 사랑받은 거잖아. 엄마 슬퍼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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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이랑 서로 누가 더 사랑하니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분위기가 순식간에 슬퍼지려 하자 나는 그럼 똑같이 사랑하는 걸로 하자고 제안했고 은설이는 오케이 했다. 휴우 다행이다. 분위기 망칠 뻔했다.
철저히 보호자에게 의존된 채 태어난 은설이라는 존재는. 신기하리만치 나를 변화시킨다.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게 행동하게 된다. 변화인지 발견인지 헛갈린다. 여하튼 내가 모르는 나와 만나게 되고 천국과 지옥을 수시로 오간다. 구원은 언제나 은설이에게 달려있다. 신기하지, 이 아이의 생사는 신이 아닌 인간인 나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저히 종속된, 나의 모든 조건에 종속된 이 작고 여린 생명체가 나를 구원한다. 나의 세계를 뒤흔든다. 나를 고꾸라트리고 나를 세운다. 나를 침잠하게 만들고 나를 높은 곳에 오르게 한다. 나의 이 반응이 건강한 엄마의 반응은 아닌 것만 같다. 엄마라면 자고로 중심을 딱 지키고 의연하게 반응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난 정반대였다. 내 행복의 키를 선뜻 은설이 손에 쥐어주었다. 은설이가 흔들면 나도 흔들렸고 은설이가 잠잠하면 나도 잠잠했다. 은설이가 아기 때만 보여주는 잠잘 때만 웃는 배냇짓 하나에도 온 세상이 고요해지고 아이와 나만 존재했다. 뭐든 다 해줄게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그 찰나들은 천국의 볕을 잠깐 쬐고 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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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아. 너는 알까. 네 존재만으로 엄마는
구원을 얻은 것 같다는 걸.
은설아. 고마워.
엄마한테 와줘서 정말 고마워.
201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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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으로 아이의 울음에 둔해지고 무감각해졌을 때, 우는 아이를 침대에 덩그러니 놓아두고 방문을 조금만 열어두고 거실에 서서 문 틈 사이를 무표정으로 보고 있던 내가, 짜증이 극에 달해서 울음이 울음을 불러오는 지경에 이르러서 귀도 닫고 맘도 닫으며 그만 좀 울라고 진절머리 난다고 괴물처럼 소리치며 다그친 내가, 이제는 아이가 우는 얼굴을 보면서 웃을 때도 있다. 웃으며 안아준다. 그러고 나중에 말해준다. 웃을 때도 어쩜 이렇게 이뻐. 웃을 때도 울 때도 예쁜 짓 할 때도 말썽 부릴 때도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둘째가 생기면 은설이보다 더 예뻐할까 봐 둘째를 망설이는 나의 맘을 너는 알까. 대체 이 마음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신기할 따름이다.
아이들이 예쁘다고 생각해서 어린이집 교사를 했지만 나는 순진했다. 아, 아이를 아이 그대로 보지 못할 만큼 못됐던 걸까. 나는 정말 예뻐한 아이가 별로 없었다. 나는 겉으론 친절하지만 속은 냉랭한 사람이다. 왠지 모르게 차갑게 대한다는 걸 나는 안다. 조용히 선을 긋고는 그 주위를 맴도는 아이를 외면한다. 마냥 예쁘고 순수하지 않으며, 아이도 어른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편의대로 행동하며 얄밉고 손해 보기 싫어한다. 힘을 가진 자에게 바짝 엎드리고 만만한 자의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 한다. 나는 안다. 아이는 결코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그런 내가. 내 아이라고 싸고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생긴 걸까. 본성이 본성으로 보이고 미워보이지 않는다. 다듬어져야 할, 배워나가야 할, 연습해야 할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징글징글하고 꼭 나의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요 작은 녀석이 만만치 않다 느끼기도 하지만, 세상에, 나의 세계에, 이런 존재가 또 존재할까? 부모에게서도 남편에게서도 마음껏 받지 못한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엄마라는 이름, 참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그 이름을 나에게 선물해준 이 녀석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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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 엄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어요?
나: 엄청 궁금했지! 얼마나 예쁜 공주님일까. 목소리는 어떨까. 눈은 얼마나 빛날까 하고 궁금했지.
은설: 내가 공주님인걸 어떻게 알아?
나: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로 배 이렇게 이렇게 보면서 고추가 없네요. 공주님이에요.라고 말해줘서 알았지.
은설: 그래도 이렇게 예쁜 줄 몰랐지?
나: 그럼! 공주님인 건 알았어도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인 줄 몰랐지!
은설: 나도 뱃속에서 엄마가 어떨까 하고 궁금했어. 나와보니 엄마가 (엄마 볼 두 손으로 감싸며) 내 엄마지 뭐야? 엄마, 내 가족이 돼줘서 고마워요. (안아줌)
나: (안기며) 은설아~ 엄마 딸로 와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 은설이가 있어서 정말 행복해.
은설: (어깨를 귀에 붙이며) 엄마. 좋아.
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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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무렵, 나는 새벽에 잠투정인지 배앓이인지 우는 아이를 안고 주저앉아 달래며 속으로 속으로 울며 말했다. “은설아, 너는 절대로 결혼하지 마. 연애만 해. 자유롭게 살아. 동거해도 돼. 아니다 결혼해도 돼. 아이는 절대 낳지 마. 넌 행복하게 살아.” 하면서... 나중에 이 말을 들으면 은설이는 슬프고 미안하겠지.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괜찮을 것 같다. 내 몸에 다른 생명을 품어보는 경험, 그 아이와 눈을 맞춰보는 경험,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경험, 아이에게 커다란 존재가 되는 경험, 그로 인해 더 큰 존재에게 매달려보는 경험, 세상의 중심이 바뀌어보는 경험, 신비롭고 쉬이 주어지지 않는 경험이다.
아이를 낳고 돌보면서 힘든 부분에 너무 치중한 것 같은데 요즘 나 살만해졌나? 이런 이야기도 해보게 된다. 경험상 이런 얘기하면 바로 힘든 시기로 돌입하던데 두려움과 함께 써본다. 은설이는 감동이다.
20.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