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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나 Nov 06. 2020

아빠에게

죽이고 싶은 당신에게


아빠,

자꾸 이런 일에 아빠를 불러들여서 미안해. 사실 아빠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겠어. 아빠도 나름 애쓰며 살아오셨는데. 잘못이 잘못인 줄 모르고 사셨잖아. 아빠 말대로 목숨 붙어있으니까 사는 거였잖아. 죽지 못해 사셨잖아. 그 괴로운 인생 하필이면 처자식이 있어서 맘대로 죽지도 못하고. 아빠가 고생 많았지.

가난하게 지지리도 가난하게 태어나서 중학교 교복 맞춰놓고는 결국 열다섯부터 일을 시작해야 했지. 지금 보면 아빠 공부 좋아할 거 같은데, 혼자 한자 공부도 하시는 거 보면 공부 잘했을 거 같은데, 다섯 형제 중 첫째라는 이유로 너무 어린 나이에 사회에 뛰어들었지.

시골 산소 가면 칡뿌리 보면서 반가운 얼굴로 나한테 도영이한테 캐주던 거. 생각해보니 나무뿌리며 껍질이며 뭐든 먹을 수 있는 건 먹었다던 아빠의 시절이 나는 감히 상상이 안 돼.

아빠가 나에게 편지 써준 게 생각나. 학원 가면서 주머니에 든 걸 보고 알게 된 편지. 반듯하고 멋있는 아빠의 손글씨로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에게 써준 편지 말이야. 내용이 기억이 안 나. 아마도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쓰여있던 것 같아.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빠를 참 미워하며 살아왔는데, 그 편지를 받고부터는 아빠를 이해하고 싶어 졌어. 아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러겠지.

맞아. 아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군인인 할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으며 자랐고 생활고로 배우지도 못하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할머니의 남편 역할도 해야 했고 동생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야 했고... 이미 그것만으로 너무 버거웠을 거야. 그래도 아빠, 빈 손으로 서울 올라와서 집 하나 마련한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야? 나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야. 아빠는 아무것도 안 보고 돈만 보며 열심히 일했어. 몸이 망가지도록. 그래, 아빠는 그거면 충분해. 내가 말했지. 아빠는 우리 가족의 지붕이 되어주었어. 잠 잘 곳이 있었잖아. 먹을 밥도 있었고. 입을 옷도 있었어. 뭐가 부족해. 충분했어.

그래서 난 아빠를 미워할 수가 없어.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아빠의 생을 갈아서 내가 이렇게 먹고 자고 배웠는데. 아빠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쓸쓸하게 늙어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그럼 안 되지.

그런데 아빠를 소중히 여길수록 너무 내가 괴로워. 아빠를 이해할수록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돼. 아빠의 세계로 들어가면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어. 아빠의 눈을 가지고 보니 내가 참 ... 형편없더라. 하등 쓸모없는 인간이야. 학자금 대출도 없이 대학을 다닌 게 어마어마한 일이란 걸 알게 되니, 서울에 집 한 채 있다는 게 대단하단 걸 알게 되니, 내가 밥 벌어먹고 살아보니, 나이를 먹어가 보니, 아빠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찔해지기도 해.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아빠로 내가 살아왔는 걸. 그리고 아빠의 생을 갈아 넣어 나에게 투자한 만큼 내가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아빠에게 쥐어주어야 하는데, 난 뭐가 없네. 아무것도 없어. 먹이고 입히고 재워줬는데 내가 계속 아빠에게 뭘 바라게 돼. 그럼 안 되잖아. 즐겁게 먹고 싶고 외식도 하고 싶고, 예쁜 옷 입고 싶고, 따뜻하게 잠들고 싶어. 근데 그런 걸 바라면 안 되잖아. 아빠는 이미 바닥에 고인 물까지 벅벅 긁어서 우리에게 퍼다 주고 있었잖아.

아빠가 그만큼 마음이 넉넉지 않은 걸 미워해야 할까? 아빠가 가난하게 자랐던 걸 미워해야 할까? 팍팍한 인생을 탓해야 할까? 주어진대로 사는 게 인생인데, 죽지 않고 살아왔는데, 나한테까지 미움을 받으면 아빤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

그치만. 아빠를 미워해서 미안해. 미안하지만. 나는 아빠가 미워. 나는 밉다는 말보다 싫다는 말이 참 정 없게 느껴지더라. 아빠를 진짜 싫어했었어. 넌덜머리가 나게 싫었어. 아빠를 향한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면 기함하겠지. 아빠. 내가 아빠를 싫어했단 걸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에이. 그래도 아빠도 기억이란 게 있잖아. 물론 편집되고 과장되었겠지만 종종 도영이와 내가 추억 여행하며 상기시켜주잖아.

아빠가 힘들었단 거, 대체 내가 알게 뭐야? 아빠가 그런 고생을 하고 그런 개인의 역사를 지녀서 더 이상 아내와 자녀에게 좋은 것을 흘려보낼 수 없다는 걸 내가 알게 뭐냔 말이야. 철저히 본인 중심적으로 희생한 아빠 이야기 이젠 지겨워. 아빠의 세계엔 아빠밖에 없었지. 그저 엄마와 나 도영이는 아빠의 세계에서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어. 가족. 가족. 가족이 최고라고 깊이 새기게 만들어놓고는. 가족? 좆같은 소리. 남한테도 그렇게 못하는 걸. 비열하게 찌질하게 힘없고 자신에게 종속된 아내와 아이들을 처참히 짓밟아버린 거. 내가 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술 핑계 대지 마. 할아버지 할머니 탓하지 마. 세상 탓하지 마. 그 시대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마. 아빠가 때리고 갈기고 찢어댄 건 다름 아닌 아빠가 그토록 최고라고 여기던 아빠 가족이야. 내가 아빠의 잔소리를 훈계를 정신교육이라 표현하는 이유가 달리 있는 줄 알아? 그야말로 내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이야. 아빠처럼 열심히 사는 시람 없다고, 아빠처럼 가족 생각하는 사람 없다고 여겼으니까. 나쁜 놈. 만약 내가 기사로 혹은 주변 지인의 이야기로 아빠를 접했더라면. 욕을 해줬을 거야. 불쌍한 척하지 마. 그런다고 지난 일이 없어져? 이제 와서 능구렁이 마냥 요리조리 어물쩡 넘어가서는 하하호호하고 싶다고? 피가 아직도 철철 흐르는 우리 곁에 있으려고? 진짜 좆같은 게 뭔 줄 알아? 아빠에게 돈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ㅅㅂ 그놈의 돈. 아빠는 또 돈이 있으니 자식들이 엄마가 이 정도 해준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해. 그거 때문에 구역질이 나오려고 해. 이런 내가 싫어져. 아빠의 잘못이 뭐냐고 물으면 내가 대답해 줄 수 있어. 아빠는. 내가 나를 싫어하게 했어. 내가 나를 진짜 그지처럼 보게 했어. 아빠가 그렇게 봤잖아. 니가 그렇게 날 경멸하듯 쳐다봤잖아. 세상 쓸모없는 인간 뒤치다꺼리하느라 니 인생 고달프다며 온몸으로 말했잖아.

너는 뭐 얼마나 대단한 줄 아니? 너보다 못 배워도 심성 곱고 착실하게 사는 사람 많아. 너 나한테 왜 너보다 못한 애들이랑 비교하냐고, 너보다 잘하는 애들이랑 비교하면서 더 잘할 생각을 하라 했지? 너는? 너는? 왜 빚투성이에 가족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만든 가장 얘기만 해? 왜 너보다 나은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해? 살다 보니 아니더라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따뜻한 아빠. 있더라고. 씨발 다 나처럼 맞고 자라지는 않았더라고. 다 나처럼 등신 소리 들어가머 큰 건 아니더라고. 이게 말로만 듣던 후려치기 아니냔 말이야. 자기 실체가 까발려지기 두려워서,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깎아내려서, 자기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게.

불쌍한 건 우리야. 불쌍한 건 엄마고 나고 도영이야. 그러니까 우리 앞에서 제일 불쌍한 척은 하지 마.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불쌍해서 나만 나쁜 년 만드는 아빠가 정말 미워. 사실이잖아. 엄마를 패고 도영이랑 나를 때리고. 욕지기를 퍼붓고 하등 쓸모없는 사람처럼 대했잖아. 나 스스로 기생충 같다고 여겨질 만큼 우리가 짐스럽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잖아. 지금은 안 그래서 더 미워도 못하겠고. 짜증 나게 아직까지도 나는 아빠가 걱정돼. 그리고 걱정하면서 아빠 딸로 있고 싶어. 끝까지 아빠를 변호해.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 그래서 미안해. 알아서. 이해해줘. 내가 여태까지 아빠 많이 이해해줬으니까. 이젠 아빠가 나 좀 이해해줘. 미워라고 할 수 있게.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아. 못된 아빠 죽이고 나는 나로 살래. 착한 아빠만 남아줘.



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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