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한나 Dec 29. 2020

아빠. 삼촌. 그때에 관한 기억

기억난다.

'기억난다' 하고 읊조리면 아빠의 부릅뜬 눈이 떠오른다. 그리고 몽둥이 같던 두툼한 손바닥이 생각난다. 나는 그런 아빠를 떠올리며 불쌍한 나로 머물고 싶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써본다. 아빠의 손에는 굳은살이 많다. 저녁마다 아빠는 신문지를 깔아놓고 커다란 작업용 커터칼로 손과 발에 베긴 굳은 살을 깎았다. 아프지 않다는 아빠의 말이 신기했다. 아빠는 갈색 액체의 무좀 약을 발가락 사이사이에 바르며  하며 숨을 들이마시고 - 하며 바람을 불었다. 아빠는 고되면 내게 안마를 시켰다. 주로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아빠한테 화내고 싶은 만큼 세게 때리라고 했다. 신나게 주먹으로 종아리를 내치면서 안마를 했다. 아빠는 시원하다며 허허 웃었다.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어 진다. 아빠는 어렸을  비행기를 곧잘 태워줬다. 아빠 발바닥에 배를 대고 손을 맞잡는다. 아빠는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갈비뼈를 간지럽힌다. 낄낄낄 아빠는 광대가 실룩거리게 웃는다. 이히히. 흔하게 들을  없었던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눈은 주름으로 작아져있다. 훤히 드러난 아빠의 앞니가 낯설고 어색하지만 아빠가 좋아 보여서 안심이 된다.  번은 아빠가  먹고 집에 와서는 나에게 당신의 발을 씻으라고 하셨다. 내가 싫은 티를 내면  발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냄새나고 어그러졌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억지로 따순 물을 대야에 담아서 아빠 발을 씻겨주었다. 거칠거칠하고 딱딱한 발이다. 옆에서 엄마는 신경질 적으로 이야기한다. 애한테 별걸  시킨다면서. 아빠의 고생을 가족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던 아빠가 보인다. 어리광   제대로 부려보지 못한  자라서일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보호받고 싶은 마음,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중년의 남성이 보인다.

기억난다. 셋째 삼촌, 종수 삼촌이 생각난다. 아빠처럼 키도 작고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이 있는 체구의, 아빠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참으로 다른 종수 삼촌이 생각난다. 삼촌의 눈은 아빠의 눈처럼 크고 부리부리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웠다. 성격도 그러했다. 모질지를 못했다. 삼촌은  앞에서 눈물   보인  없지만, 항상 눈물에 젖어있는  같은 눈망울이었다. 삼촌은 폭력적인 아빠와 달리 술을 마셔도 슬퍼 보이기만 했다. 삼촌의 입은 웃고 있었다. . 좋아.  항상 입에 달고 다녔다. 어릴  사진을 보면 삼촌이 동생 입학식에도 함께 가주었다. 도영이랑 나를 데리고 산에 올라주기도 하고 그때의 사진엔 정말 편안해 보이는 도영이와 내가 있다. 우리 집에 오면 항상 엄마에게 형수, 형수, 고맙다고 말했다. 삼촌은 약간 술에 취한  우리 집에 와서 소주  병과 도영이와  먹으라고 아이스크림을 한 봉지  사 왔다. 그러곤 정말    마시고는 삼촌 집으로 돌아갔다. 삼촌 집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20 정도 걸렸다. 그러나 매번 택시를 불러 타고 갔다. 돈은 쓰려고 버는 거라면서 택시비를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아빠는 내일  가야 한다면서 삼촌이 와도  방에서 주무셨다. 간혹 저녁식사시간에 삼촌이 오면 아빠와 같이  한잔 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그냥 혼자  드시고 가셨다. 삼촌은  쓸쓸해 보였다. 입으론 웃고 있었다.  좋아. 하고 항상 말했다.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가시는 삼촌의 뒷모습이 기억난다. 고3 때 나는 공부를 핑계로 삼촌 집에 같이 살았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야자하고 들어오면 삼촌은 자고 있었다. 별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가끔 삼촌 집에서 밥을 먹게   식사 마치고 상을 치우려고 하면 바로 치우지 말라면서  없다고 했다. 삼촌은 장가를 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동남아 아가씨라도 데리고 살라고 했다. 할머니의 잔소리를 고분고분 듣는 삼촌이 안쓰러웠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혼약속까지 했던 분이 있었던  같은데   됐다고 했다. 내가 대학교 때였나. 삼촌이 돌아가셨다. 삼촌이 돌아가시기  아빠에게  한잔 하자고 하셨는데 아빠가 바쁘다고 나중에 하자고 했었단다. 그러고  연락이 없어서 아빠가 삼촌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며칠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한 아빠는 삼촌 집에 찾아갔다. 문이 잠겨 있었다. 아빠는 다시 집으로 와서 연장을 챙기고 삼촌 집으로 갔다.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삼촌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며칠   같았다고 했다. 동생은 그때의 일을 전해 듣고는 자살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그저 아빠가 말해준 대로 욕실에서 미끄러져서 머리에 피가 많이  돌아가신 거라고 믿고 있다. 아빠는  119 불러서 수습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 나는 아빠의 부탁대로 삼촌이 사용하던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에 일일이 부고 문자를 보냈다. 삼촌이 다니던 교회에서도 장례식에 오셨었다. 삼촌은  교회를 찾아갔을까? 사는  많이 힘드셨을까? 마음 붙일  하나 없어 보였다. 그래서 교회라도 다니신 걸까? 삼촌은 구원받았다고   있을까? 하늘나라에 갔을까? 그 당시에 나는 너무 무서웠다. 정형화된 신앙인의 모습이 삼촌에게선 보이지 않았다. 삼촌이 지옥에 갔을까 봐, 그럼 너무 불쌍하니까, 그래서 무서웠다. 장례식에서 나는 어떤 일도 도와드리지 않고 삼촌 사진 곁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우리를 제일 아껴주던 삼촌.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셋째 삼촌. 삼촌은 나무 만지는 일을 했다. 목수라고   있을까.  모르겠다. 할머니 집에 가면 나무를 조각해 만든 액자가 걸려있었다.  액자에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안아주려고 다가가는 모습이 조각되어이 있었다. 우리 집에도 삼촌이 만들어준 상과 특이한 분재 모양의 나무 조각이 있었다. 가끔씩 삼촌이 보고 싶다. 내가 결혼한 모습도, 내가 은설이라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도영이가 스킨스쿠버 강사로 지냈던 것도 알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삼촌의 웃음소리가 기억난다. 신기했던  웃음소리. 목이 꿀렁꿀렁 울리면서 내던  웃음소리. 도영이랑 내가 장난친다고 많이 따라 했었는데 흉내내기 어려웠던  웃음소리. 날씨가 흐릿하니 삼촌이  보고 싶어 진다.

기억난다.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 인도네시아 반둥으로 한 달 전도여행을 다녀오고선 1년 동안 거기서 살고 싶었다. 수도인 자카르타는 엄청 습해서 불쾌지수가 치솟았는데, 주로 묵게 되었던 반둥이라는 도시는 마치 휴양이라도  것처럼 아침이 되어 창을 열고 내다보면 푸르고 맑고 쾌적했다. 나무가 많은 인도네시아는 어디든 돌아보면 아주아주 커다란 나무들이 많았다. 내가 갔던 때는 우기였었는데, 순식간에 비가 쏟아져 도로에서 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가 되기도 했다.  마냥 좋았다. 푸르른 나무를 실컷   있어서, 비가 내려서 좋았다. 딱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거나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기도를 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학기가 되어서, 밤마다 11시가 되면 나는 자취방에서 나와 정남수 기념관  꼭대기층에 있는 기도실에 올랐다. 차가운 바닥에 오들오들 떨면서 나는 기도를 한답시고 시간을 보냈다. 어떤 때는 졸다가 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대체 무슨 기도인지 모르게 횡설수설하다가 오기도 했다. 그래도 눈물로 소리 내어 기도하다 오면 그렇게 후련하고 세상 행복해질  없었다. 인도네시아 가게 해달라고 시작한 일종의 시위 같은 기도였는데, 나는 그냥 아무거나 기도했다. 생각나는 대로. 한 번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게 벅차서 기도를 마치고 나와서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새벽 캠퍼스를 걸어가며 하나님께 보여주는 기쁨의 몸짓이었다. 한 번은 기도 중에 불현듯, 나는 누구인지, 하나님은 누구인지 마치 이제 자아가 생긴 사람처럼 뜨겁게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을 흘리며 수첩에다가 질문들을 퍼부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세상에 있습니까.  나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되었습니까. 예수와 내가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무얼 하며 살아야 합니까.  나는 배가 고프고 졸린 한낱 인간에 불과합니까. 그런 인간이라면 대체 이런 질문은  쏟아지는 겁니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는 정남수 기념관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을 잠가놓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지붕에 올라갈 수도 있었다. 나는 종종 쓸쓸하거나 밤하늘만 가득 보고 싶을 때면 지붕에 올랐다. 지붕에 올라 별을 세었다. 지나가는 기차도 보았다. 하늘이 가득한 곳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하늘에 조금  가까웠다는  만으로 나는 위안을 받았다. 그때의 열정이 기억난다. 그때의 간절함이 기억난다. 아빠는 분명 단기선교를 반대할 테고, 중고등부 수련회 가려고 아예 집을 나갔던 것처럼 아빠는 나 몰라라 하면서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3 금식기도도 해봤다. 그래도 아빠는 반대했다. 미리 휴학도 저질러놓고, 선교 가겠다고 모임 때마다 기도도 받아놓고, 선교사님이랑 어느 정도 이야기도 해놓고 결국 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빠를 원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된다고 하시는  같은 하나님. 차라리 단기선교 가고 싶은 마음조차 주시지 말지.  마음은 이미 그곳에서 사람들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기도하고 섬기며 시간을 보내는 거였는데... 창피했다. 확실히 해두고 간다고 말할걸, 아빠의 허락 없이 가고 싶지 않았으면서, 아빠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알았으면서,  일을 진행해나갔을까.  후로 창피해서 선교단체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이 부끄러웠다. 실패자 같았다. 하나님을 향해 -  마음. 눈앞에 좋은 것들을 보여주시고는 '그런데,  것은 아니야.'라고 거둬가시는 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멀리하고 싶었다. 점점 마음이 굳어져갔다.

작가의 이전글 보고 싶지 않은 또 다른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