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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느 Mar 14. 2024

Day 9

나는 다전입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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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전은 검은색 한복을 건네받았다. 그새 손톱 언저리에 거스러미가 잔뜩 일어선 아빠의 손이 보였다. 잘게 떠는 그의 손을 다전이 힘껏 맞잡았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말하지 않았다. 소리내는 법을 잊어버린 듯이. 그건 다전도 마찬가지였다.


따로 마련된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하얀 리본이 달린 실핀도 머리에 꽂았다. 다전은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돈했다. 얼굴도 잠시 들여다봤다. 눈 주위는 물론이고 얼굴 전체가 퉁퉁 부었다. 엄마가 못났다고 하려나. 다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지가 사라진 후 다전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만 웅얼대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이윽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입었냐는 아빠의 신호일 것이다. 다전은 서둘러 문을 열고 나왔다. 바로 앞에 환히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이 보였다. 어느 날의 여행에서 들꽃이 무더기로 핀 장소를 발견했었다. 꽃들이 크게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헤쳐가 다함께 앉은 뒤 사진을 찍었다. 그때의 사진을 엄마의 모습만 나오게 크게 확대한 것이었다. 빈소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던 다전은 이내 한 쪽으로 물러났다. 소란스러운 말소리와 발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다른 방에서 상복을 입은 친인척이 우르르 들어왔다. 다전과 아빠, 그들과 조문객이 한데 뒤섞이기 시작했다.


“다전아.”


아빠의 회사 동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보자마자 다전이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흐···, 흐. 손바닥 사이로 잔뜩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정이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이제는 손과 몸까지 떨기 시작한 다전을 느끼며 다정은 더더욱 안아주었다. 그가 진정될 때까지.


다전과 다정은 빈소 옆에 있는 식당 한구석에 가 앉았다. 서로 어깨를 기대어 손을 맞잡은 모습이 꼭 데칼코마니 같았다. 포개면 하나로 합쳐질 듯한. 눈물을 그친 다전은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닿아 있는 몸으로 다정의 체온을 느끼며, 그녀의 손으로 가만가만 제 손등을 도닥여주는 손길을 느끼면서. 


다정한 손길에 비해 그녀의 손은 투박했다. 손등을 타고 그녀의 손바닥에 여기저기 있는 굳은살이 닿았다. 어릴 적엔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에 새하얀 손을 가져 다전이 손 모델이라는 직업도 있다고 권유할 정도였다. 다정의 손은 대입을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운동 모임에 들더니 빠르게 변했다. 마디가 굵어지고 손등에 자잘한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거칠어지더니 단단해졌다. 어느새 눈을 뜬 다전이 그녀의 손바닥을 잡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다정의 굳은살들을 꾹- 눌러댔다. 헤이, 헤이. 뭐 해. 밥 좀 먹을래? 다정이 말했다. 조금은 기운 차린 걸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다전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엄마의 굳은살은. 그치?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속으로 물었다. 다전의 눈이 다시 감겼다.



“나, 못 뛰겠어.”


주말을 틈타 둘은 함께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다전이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기 시작한 지 세 달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미지를 보낸 후 다전은 첫 학기가 끝날 때까지 모든 수업과 학과 활동에 성실히 임했다. 아빠와 함께 병원에 가 상담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점점 미지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그들의 주변 사람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다전 또한 괜찮다고 되뇌었다. 다정에게 먼저 뛰러 가자고 연락을 보낼 정도였으므로. 여름의 활기를 머금은 강변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으므로.


“컨디션 안 좋아? 왜?”


다전의 입술이 달싹거리기만 했다. 밖으로 말을 미처 꺼내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다정이 한 걸음 다가갔다. 한 팔로 다른 팔을 감싸안으며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돼. 앞을 보고 뛰어야 하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작은 소리로 다전이 말했다. 뒤? 다정이 흘긋 그녀 등 너머를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런 거라면. 말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한 다정이 다전의 한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에 맞춰 다전이 천천히 뒤따라왔다. 


“일단은 걷기만 하자. 뛰고 싶어지면 얘기해.”


응··· 다정의 뒤에서 다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르른 나무, 강물과 햇빛이 만나 반짝이는 풍경 따위를 다정은 애써 경쾌하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무리하지 않도록. 다전도 그런 노력을 알아챘는지 그의 말에 반응하고 다른 화제를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걸으면서, 간간이 웃으면서도 다전은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두고 온 것이라도 있는 듯이.



그날을 마지막으로 둘은 한 해가 지나도록 뛰지 않았다. 만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며 다전은 바빠졌다. 다정이 가끔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연락을 보내도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안, 생활비랑 등록금 벌어야 해서. 알바 때문에 영 시간이 안 나. ㅠㅠ 아빠에게서 용돈을 받아도 다전은 대부분 저축했다. 필요한 돈은 스스로 마련해 충당했다. 조금이라도 아빠의 짐을 덜기 위한 노력이었다. 미지가 없어진 자리는 어느 정도 채워졌으나, 어떤 것은 노력해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다전과 다정은 전화로만 근황을 나눌 수 있었다. 그도 아주 잠깐뿐이었다. 안 바쁠 때 꼭 만나자! 통화를 끝낼 때쯤 둘이 항상 나누는 인사말이었다.


내년엔 나랑 꼭 다시 뛰러 가자. 달리는 거 좋아했잖아, 너. 연말쯤에 다전은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에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다정에게 온 문자였다. 올여름 이후 처음이었다, 함께 운동하자는 말이. 다전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버튼을 눌러 껐다. 다시 뛸 수 있을까. 두 번째 학기를 마치고 결국 휴학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조금 모자란다는 계산이 섰다. 다음 학기 등록금, 생활비, 비상금, 적금. 당장 생각나는 항목만 해도 이 정도였다. 다전은 아빠에게 휴학하겠다고 말한 날을 떠올렸다.


“아빠가 미안하다···”


고개를 푹 숙인 아빠, 찌푸린 미간과 푸석한 얼굴을 쓰다듬는 아빠. 주저하며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아빠의 모습과 목소리. 멍하니 꺼진 화면을 바라보던 다전의 귀를 타고 삐- 하는 버스 하차음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났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야 할 때라고. 중얼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다전은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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