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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느 Mar 18. 2024

Day 10

나는 다전입니다 (10)

0:43:51

7’30’’/KM

5.268KM


이삿날이 코앞으로 바짝 다가오자 다전과 아빠는 베란다를 정리하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미루고 미룬 최후의 공간이었다. 부녀는 마스크를 쓰고 통창을 활짝 연 다음, 베란다에 딸린 붙박이장을 열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먼지가 허공으로 흩어지며 일순 시야를 가렸다. 다전은 한 걸음 물러났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그들의 뒤에는 입구가 열린 포장박스 여러 개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버릴 거, 안 버릴 거 잘 구분해서 박스에 넣자. 아빠의 목소리에 다전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서랍 한쪽에 놓인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장례식 이후로 그의 물건을 넣어놓고서 둘 다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다전은 크게 심호흡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어떡해, 해야지, 그래도. 다전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빠, 이거 뭐야?”


한참을 각종 물건을 포장하거나 버리던 그들의 손이 멈췄다. 다전은 색이 바래고 모서리 이곳저곳이 해진 종이박스를 들고 있었다. 박스 한 면에는 파란색 매직펜으로 ‘달리기'라고 쓴 흔적이 있었다. 미지의 글씨체였다. 아, 그거···. 다전의 아빠가 박스를 건네받아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대여섯 개의 메달과 꽤 두툼한 서류봉투가 있었다. 다전은 봉투를 집어 들고 손에 집히는 대로 종이들을 꺼내 보았다. 중요 문서라도 되는 듯이 보관되어 있던 것은. 250928 서 미 지. 2000년 하프 코스 완주. 미지가 그동안 달린 마라톤 기록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증명서와 배번호를 손에 쥔 다전의 손이 떨렸다. 봉투 안에는 ‘달리기 일기'라는 제목의 작은 수첩도 들어 있었다. 미지가 처음 달리기 시작한 날부터 다전과 뛴 날들까지 짤막짤막하게 쓴 내용이 담긴. 첫날부터 자신과 함께한 날이 한 수첩에 있는 거로 보아 엄마는 성실한 기록가는 아니었음을, 그런 생각이 미치자 다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어느 페이지에 다다른 다전은 이삿짐을 싸는 것도 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포장박스 사이를 헤치며, 거실에도 널브러진 박스들을 훌쩍 뛰어넘으며 자신의 방으로 가 핸드폰을 찾았다. 뛰지 마라! 아랫집에서 또 올라온다! 아빠의 다급한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다전은 메신저 앱을 켰다. 혹시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돼? 나 다시 해볼래. 그의 연락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곧장 다정에게 답장이 왔다. 콜! 다시 주말마다 만나기 시작한 그들은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뛰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래도 다전은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쓴 내용을 생각하며. 다음 해 여름, 다전은 다정과 5km 코스를 달리는 대회에 나갔다. 나중에 받은 사진에는 발갛게 된 얼굴로 앞을 바라보는 다전의 모습만 볼 수 있었다.



?:??:??

?’??’’/KM

21.0975KM


다전은 이제 광장 한복판에 서 있다. 가벼운 러닝화와 얇은 러닝 쇼츠, 티셔츠를 입고 머리엔 땀이 얼굴까지 흘러내리지 않도록 헤드밴드를 썼다. 혼자 또는 삼삼오오 모여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전도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배에 붙인 번호표가 눈에 들어왔다. 11060 나 다 전. 들을 순 없어도 아직은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기억난다. 따뜻한 빛이 담긴 눈길로, 느릿하게 부르는 그 소리를 떠올린다. 다전은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몸의 열을 내기 시작한다. 첫 하프 마라톤, 그가 내게서 바랐던 일. 출발 시간 전까지 입으로 푸- 하는 소리를 내며 긴장을 풀어보려고 애쓴다.


허리춤에 찬 러닝용 가방에서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다전은 핸드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했다. 역시나 다정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나 너가 알려준 골인점 가는 중! 야, 근데 가다가 웃긴 거 봤어 ㅋㅋ 곧이어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전봇대에 설치된 작은 화살표 표지판을 찍은 것이었다. 다전은 사진을 크게 확대해 화면을 들여다봤다. 표지판에는 ‘사단법인 싱겁게먹기 실천연구회'라고 쓰여 있었다. 뭐 이런 단체가 다 있냐? 그래도 왠지 몸 좋아질 것 같지? 식단 할 것 같고 막 ㅋㅋㅋㅋ 가입 방법 찾아봐야지. 가을에 등반 여행을 가기로 계획한 다정은 한창 가지각색의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었다. 나 한 시간 반 목표야. 포카리스웨트 좀 사다죠. 답장을 보낸 다전은 다시 가방에 핸드폰을 넣은 뒤 출발선을 향해 걸어갔다.


기록 갱신에 욕심을 내는 사람들은 미리 저만치 가 있었다. 다전 또한 계속해서 출발선 앞으로 나아갔다. 수상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최고 기록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선두 그룹에 서야 했다. 많은 사람 사이사이를 비집고 갈수록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저마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 마라톤 행사를 진행하는 MC의 멘트, 빠른 템포의 음악이 다전을 둘러쌌다. 어수선함을 틈타 팀장의 말까지 흘러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동기와 대화를 나누고 며칠 있다 다전은 팀장에게 말을 건넸다. 퇴근길에 혼자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고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은 다전이 그의 옷소매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저, 팀장님. 짧은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전은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번 내뱉자 이후로는 망설임 없이 나왔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라서 개명 생각은, 없습니다. 붙들린 김 팀장은 당황해하다가 그랬구나. 그동안 미안했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다전은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꼭 반환점을 돈 것만 같았다. 


하프 코스 출발! MC가 크게 외쳤다. 시작을 알리는 축포도 출발선 양옆에서 울려 퍼졌다. 다전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다가 천천히 나아갔다. 코스를 따라 달릴수록 혼란스러운 소리에서 점차 멀어졌다. 숨이 차고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프 마라톤을 처음 뛴다는 생각에 긴장했는지 연습 때보다 더 빠르게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전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5km를 다시 뛰기 시작한 그때처럼. 숨이 막혀도 저기까지만 달리면 된다. 견디다 보면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그의 기록을 다시 찾은 것처럼. 다전의 다리가 점차 빠르게 움직였다.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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