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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Nov 16. 2023

남산 아래, 비건 키친과 오베흐트

건강하고 힙하고 다하는 환상의 비건 코스

  버릇

   윤리적 비건 14년 차,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 가끔씩 '비건 식당'을 검색해 보는 건데 유의미한 버릇이란 생각이다. 언제 갑자기 가게 될진 모르지만 정보를 위해서, 혹은 단순한 호기심 정도라 해두자. 그렇게 우연히 '남산 비건'을 검색하다가 찾아낸 '비건 키친'이었다.  내심 가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1년 만에 만나는 사이, 작년 8월 해방촌에서 본 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둘 다 비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기로 묵시적 약속을 한 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데 지향을 넘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하나 실천하며, 주위에 알리고 나누는 모습은 볼 때마다 경탄과 존경심 마저 들게 한다. 


건강하고 다양한 메뉴가 다 비건이야 

 

    비건 키친(VEGAN KICHEN) 은 유독 접근성이 좋았다. 명동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 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를 보며 왼쪽길로 걸어가면 바로 보이는 초록색 간판. 주위에 늘어선 육류 위주 식당들 사이에서 순한 녹색의 에너지를 뿜고 있었다. 간판을 보며 걸어가는 길, 멀리서부터 나는 벌써 그곳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며 메뉴도 대략 정해놓은 터였다. 


왼쪽 : 식당내 로봇, 오른 쪽 : 남산 타워가 보이는 식당 주변 풍경

 

  먼저 도착한 비건 친구는 7번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못 보는 사이 좀 야윈 듯했지만 크고 맑은 눈과 예쁜 모습은 여전했다. 가정과 육아 외에 제로웨이스트 강의에 봉사까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그의 삶이라는 걸 짐작했기에 쉴 틈 없이 살았구나 싶었다. 한 편으론 아무려면 나보다 젊은 그가 보기에 1년 전에 비해 나는 더 하겠지 싶으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비건 키친'은 그동안 보아온 비건 식당 중 매우 현대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앉은 테이블에서 직접 메뉴 주문을 하고 나면, 로봇이 물을 가져다준다. 밥이 나오기 전 밑반찬 서빙까지 마치고 나면 잠시 후 메인 메뉴가 도착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밀린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로봇은 결코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왼쪽 : 비건 돈까스 정식, 가운데 7번 테이블의 상차림, 오른 쪽 : 아보카도 포케

  

  우리는 아보카도 포케와 돈가스 정식을 시켜 먹었다. 물론 전 메뉴, 김치에도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비건식이었다. 소스가 곁들여 나오는데 소스 맛이 담백하고 맛이 좋았다. 남기지 않을 정도의 밑반찬이 나오니 음식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다시 방문할 의지가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환상의 코스, 디저트는 오베흐트로 


  비건 키친에서 밥을 먹고 남산길을 걸어 디저트를 먹으러 가는 코스는 환상적이다. 이건 순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건데 아무래도 이 코스는 비건 가이드 코스로 하나 만들어도 좋을 듯싶을 정도다. 길눈이 밝은 편도 아닌데 어쩐지 잘 매칭이 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었다. 우리는 설렁설렁 걸어서 갔다. 날씨도 좋았다. 남산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따라 나는 가벼운 등산복 차림이었는데 , 친구 역시 가벼운 차림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오, 오베흐트는 역시나 오베흐트했다. 신메뉴인 보리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이렇게 맛있고 아름다운 디저트들이 식물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데 감탄하며 행복해했다. 정말 맛있었다. 


왼쪽 : 아름다운 우리들의 디저트 한상, 가운데 : 챙겨온 용기에 도우넛을 담아 사가는 사람, 오른 쪽: 친구가 찍어 준 도넛가게 앞의 나

 

친구의 선물은 아름답고, 고양이는 슬픔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친구가 불쑥 선물을 내놨다. 연한 한지와 종이 노끈을 살짝 묶은 무명 앞치마와 비건 비누였다. 플라스틱 프리의 제로웨이스트 비건 운동가의 선택답게 지독한 쓰레기 하나 남지 않을 무해한 선물이었다. 귀한 마음도 물건도 아까워서 한 동안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앞치마는 언제고 생길 수도 있을 상징적인 행사에서 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 개의 도넛으로는 부족해서 용기와 텀블러에 남산에서 일용할 양식을 담아 둘레길을 걸었다. 걷다가 걷다가 아늑한 벤치를  만나면  잠시 앉아서 햇빛과 바람을 쐬었다. 무얼 많이 하지 않아도, 특별한 얘기가 없이도 아늑해지는 시간이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풀밭에서는 맨발로 낙엽을 밟았다. 


   매 순간이 아름다웠지만, 어떤 장면 하나가 자꾸 떠올랐다. 길에서 사는 그 묘생이 어찌나 고단한 삶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 그 장면이었다. 비건 키친에서 막 나와서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회현 쪽으로 가려고 할 때였다. 식당가 옆 쪽에 놓인 녹색 쓰레기 통 아래서 쓰레기봉투를 막 찢고 있는 고양이가 있었다. 이미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사료를 사다가 주고 갈까?' 주위를 둘러봐도 마땅한 가게는 보이지 않았고, 스쳐가는 수많은 기억과 함께 나는 그냥 모르는 척, 못 본 척 지나가고 있었다. 마땅히 깨끗하고 귀엽고, 천진하고 행복해도 되는 생명이었다. 나는 아주 작고, 한껏 약한 목소리로 '어쩔 수 없었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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