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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Jul 18. 2024

아름다운 것들

질 때도 아름다운 들꽃을 보다가 

사소한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내 기질'이 나타난 건, 아마도 5~6살 무렵으로 짐작이 된다. 나는 새삼 요즘 들어서야 그걸 떠올리게 되었다. 서울의 변두리 동네에 살던 어느 날의 한 때였다. 젊은 엄마와 당시 교복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언니(우린 제법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매지간임)는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두고 외출을 했다. 흔한 일은 아니었는데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옆집인지, 옆방인지 가깝게 지내는 사이었던 이웃 언니가 내게 '소라고동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그것에 사로잡혔을 것임이 분명했다. 이웃 언니가 일러준 대로 소라고동을 귀에 댄 채로 바다의 소리를 들었다. 그 작은 껍질에서 들려우는 '우우웅' 하는 소리는 신기했다. 나는 언제까지라도 그 소리만을 듣겠다는 듯 귀에서 소라고동을 떼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일이 일어났다. 안방 장롱 위 작은 상자 속에 들어있던 시계를 꺼내다 그녀 앞에 바치는 일 말이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마가 아끼는 그 명품(?) 시계와 소라고동을 바꿨다. 거래에 성공한 대상인처럼 제법 의기양양했을게 분명했을 만큼 그 소라껍데기는 아름다웠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때의 엄마는 없고, 그때의 언니가 엄마처럼 영혼의 단짝친구처럼 은은한 불빛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비가 오는데, 비가 오지 않던 날을 생각하고 있다. 요즘 내가 감탄하고 경이로워하고 있는 어떤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내가 늘 산책하는 천변에 피어있는 들꽃들이다. 들꽃은 고요하고, 결코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려 한다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늘 그 자리에서 빛이 난다. 지난 계절에 저 꽃들은 지나치게 싱싱했었다. 행인들은 싱싱하게 피어난 꽃들을 헤치고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었다.

이미 꽃이 진 자리의 옆에서 다른 꽃이 피어나고, 핀 채로 바싹 말라가며 씨앗이 되는 들꽃도 있었다. 함부로 엉켜서 피어나거나 그 자리에서 시들어가도 결코 시들지 않는 그 무엇이 들꽃 속에는 있다. 나는 그것에서 시들지 않는 들꽃의 영혼을 보았다. 


다 시들어 사라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날개 말이다. 들꽃은 그렇게 해맑고 투명한 영혼의 얼굴을 한 채 자유롭게 존재한다. 


그러니까 내가 요즘 탐닉하고 있는 아름다움은 천변에 멋대로 피어난 들꽃이란 것! 이 말을 하려고 어릴 적 소라 고동과 엄마의 시계를 바꾼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나 보다. 아무려면 어떠랴. 5살 어린 소녀에게도, 해가 뉘엿뉘엿 지는 벌판에 서 있는 시절을 지나고 있는 여성인간에게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가꾸는 삶이란 근사해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건 시계를 잃어버려 많이 혼났을 그 기분보다는, 소라고동이 내 것이 되어 흐뭇했던 그것이 더 기억에 남아있다는 거다. 그것은 아마도 내 엄마가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애를 기죽이지 않으려고 나름 애를 썼기 때문이었거나, 아름다움에 탐닉하려는 내 기질이 만만치 않았다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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