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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l 08. 2024

미워하는 마음

story 20. 그게 뭐 어때서

싫어하는 것도 내 마음인데
좀 그러면 어때서

2019.11.01 (08:00)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 Bercianos del Real Camino (16:00) (26km)


알람이 울린다. 일어난다. 침대를 벗어난다. 이불을 정리한다. 씻는다. 옷을 입는다. 짐을 챙긴다. 어제 널어놓은 빨래들을 걷는다. 개중 덜 마른 것들을 골라 배낭에 묶는다. 아침을 먹는다. 배낭을 멘다. 하루하루 이동하는 유목생활의 시작이다. 매일이 반복된다. 하루의 행위는 반복되지만 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날씨가, 길이, 길 옆의 풍경이,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어제와 다르다. 지구상에 같은 날씨는 하나도 없다는 글을 본 적 있다. 흐린 날, 화창한 날, 비가 오는 날, 눈이 내리는 날, 지독하게 더운 날과 추운 날로 구분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똑같은 온도와 습도, 강수, 구름, 바람 모든 요소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날은 없다고. 그렇기에 일 초 전의 세상과 일 초 후의 세상 또한 같을 수 없다고. 하루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들을 느낀다. 오늘은 또 내일과 다르겠지.

안개인지 구름인지 구분이 안되던 날씨
오전 내내 부슬비가 내렸다


오늘 걸었던 지형, 여전히 평지다

어제의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보니 방에 나 혼자였다.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에 문을 연 유일한 알베르게라, 이대로라면 곧 도착할 감자씨와 같은 방을 배정받을 확률이 99.9%다. 그만은 정말 피하고 싶었는데, 이유라 하면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유랑하는 듯한 그의 행동과 난생처음 들어본 쇳소리 같은 코골이 때문이었다. 다른 방은 만석이라 별달리 손 쓸 도리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데 수빈, 소영 씨가 짐을 둘러메고 방 문을 빼꼼 연다. 빵긋 웃는 그녀들의 얼굴에 장난기가 한가득이다. "어...? 먼저 도착해 있던 것 아니었어요?"내가 묻는다. "맞아요, 오는 것 보고 같은 방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했어요."소영 씨가 대답한다. 감자씨와의 동침을 피하게 해 준 그들이 그날 나에겐 혜성이었다. 어둠을 밝혔고, 먹구름을 몰아냈고, 한기를 걷어냈다.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낭떠러지란 말이냐?

그 덕에 편히 쉬었으나 쉽지 않은 날이었다. 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추운 비가 대차게 쏟아졌다. 날카로운 바람에 비까지 쏟아지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바닥에 눈을 고정하고 시야에 발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반복을 지켜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언젠가부터 네 발자국에 한 번씩을 헤아리며 걷고 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백일흔 여덟.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백일흔 아홉. 하나부터였나. 백의 언저리즈음부터 시작했나. 의미 없는 숫자의 시작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하나.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둘. 그렇게 천 이백을 세다가, 그러니까 4800보를 헤아리다가 그마저도 지쳐서 포기했다. 숫자를 헤아리다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는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기분도 가끔은 퍽 괜찮다.

Sahagún, Arch of San Benito
Sahagún에서 먹었던 렌틸 콩 수프

13km를 걸어 도착한 Sahagún에서 몸을 데웠다. 식당 바깥쪽 자리에 따듯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판초와 신발을 벗어 말려두고는 메뉴를 살폈다. 순례길 위 점심식사로는 대개 가장 값싼 메뉴를 주문한다. 비단 순례자의 주머니 사정뿐만이 아니라 그 가격대의 음식이 넘치지 않고 적당하기 때문이다. 따듯한 음식이 고팠기에 수프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을 주문하니 초리소를 곁들인 렌틸콩 수프가 담겨 나왔다. 흐물거리는 비주얼이 마치 소가 먹다 뱉은 환약 같았으나 한입 떠먹으니 렌틸콩의 녹진하고 고소한 향이 몸을 녹여주었다.

도착할 때 다되니 날이 갠다.
한 폭의 그림 같아 모든 것이 용서되던 풍경

쉽지 않은 날씨였지만 중간중간에 위치한 San Nicolás del Real Camino와 Sahagún에서 쉬어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도착을 조금 앞두고 점차 날이 개더니 웅덩이만 드문드문 남긴 채 청명한 하늘을 드러냈다. 걷는 내 쏟아지던 비가 우뚝 멈춰버린 것이 억울해도 그 나름 위로가 되었다. 도착 후 씻고 맥주를 먹으러 나서려는데, 벌컥 문이 열리고는, 설마 했던 감자씨가 들어온다. 그는 짐을 내려놓자마자 26km를 걸어온 불쌍하고 냄새나는 양말을 채 벗지도 않고 침대에 벌렁 자빠진다. 내 억장도 벌렁 무너진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란 영 어울리지 않는 순례길이라지만 하룻밤의 쉼을 온전히 얻지 못하면 몸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다면 꽃이 기분이 좋아지는가,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가. 물론 나일 것이다. 상대를 좋아하면 내가 좋다고 했다. 법률스님의 말이다. 행복도 내가 만들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거라고. 하지만 그 꽃에서 무지막지하게 지독한 냄새가 난다면 꽃이 기분이 나쁘겠는가 내가 기분이 나쁘겠는가. 그 또한 나일 것이다. 뭐 명언이니 격언이니 '미워하는 마음은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라든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가 뭐 거창한 말 많지만 난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싫어하는 마음조차 노력해서 되돌려야 한다면 세상 따위가 너무도 가혹한 거 아닌가? 세상이 내가 모르는 사이 너무 어려워진 거 아닌가? 평생을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몇 번이고 부딪히고 맞추어가고 치이고 섞이면서 살아야 하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마음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하느냔 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겸허히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 나의 몸을 먼저 위하기로 한다. 나의 방어기제, 그러니까 '그를 싫어하는 마음'을 먼저 살피기로. 좋으면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하는 게 이리도 힘들어서야 원.

닭고기와 감자튀김으로 가진 저녁식사. 맥주는 당연하다.

수빈, 소영 씨와 숙소 근처 식당에서 닭고기와 감자튀김, 맥주로 저녁식사를 했다. 마트에서 다음날 아침거리와 간식을 산 후 숙소에 돌아왔더니 같은 방을 쓰는 독일 청년 데니스가 버섯볶음과 오믈렛을 맛있게 구워두었다. 마다할 수 없는 냄새에 부른 배를 애써 무시하고 그 길로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해치우고 나서야 먹부림은 끝이 났다. 설거지를 맡아 끝내고 방에 들어오니 감자씨는 내가 나설 때 보았던 벌렁 나자빠진 그 자세 그대로,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열창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고 힐끔거린다. 한국인이라고 말하지 않아 준다면 좋으련만 괜한 말이다. 이미 그의 배낭엔 미국 국기와 한국 국기가 사이좋게 매달려있으니. 2층 침대에 마주 보고 누운 데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지그시 보더니, 눈으로 감자씨를 가리키고는, 고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나는 지긋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데니스, 아직 멀었어. 아직 코골이가 남았다니까. 벌써 그러면 안돼.' 내 눈빛을 알아들을 리 없는 데니스의 표정이 순진하다. 내가 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따 새벽에 보자고, 친구.


Question 20. 걷는 건 어때? 힘들지 않아?

힘들다. 그만큼 걸으니 힘들 수밖에. 온몸이 아프다. 큰 보폭에 허리가 아픈가 싶어 작게 하면 엉덩이가 뻐근하다. 속도가 빨라 무릎이 시린가 싶어 줄이면 발바닥이 아리다. 8kg이 넘어가는 배낭을 짊어지고 걸으니 으레 아픈 거구나 싶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걷는다. 매일 밤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달래 보지만 내일이면 또다시 힘들걸 알기에 그냥 체념하고 마는 것도 같다. 걷는 건 그렇다 쳐도 잠자리가 힘들다. 정확히는 사람 때문에. 체력적으로 소모가 큰 하루가 지나면 곯아떨어지는 게 당연지사인 데다가, 본래 밝은 잠귀에 굳이 챙겨 끼고 자는 귀마개까지 습관이 되었건만 그 모든 걸 뚫고 잠을 앗아가는 이가 있으니 감자씨가 단연 그렇다. 세상이 떠나가지 않고 배기는 게 신기할 지경인 코골이. 모든 한국사람의 영어를 지적하고 나서는 언행. 서로를 배려하는 작은 몸짓으로 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오는 숙소에서 부르는 열창... 순례길을 걷다 보면 저런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그러거나 말거나다. 그러려고 걷는 길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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