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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l 20. 2024

홀로 떠나온 길에서

story 21. 함께 한다는 것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
고로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머문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2019.11.02 (07:40) Bercianos del Real Camino - Villamoros del Mansilla (16:00) (26km)


공사판을 방불케 하는 코골이에 침대까지 요동쳤다. 귀마개를 틀어막고 베개 깊숙이 고개까지 파묻었지만 허사였다. 새벽 사이 감자씨가 만드는 요란한 공해로 한시쯤 분노가 일었다가, 세시쯤 체념을 했고, 네시쯤 슬퍼졌으며, 다섯 시쯤 무기력해졌고, 여섯 시쯤 자포자기 심정으로 겉잠을 잤다. 잠깐 눈을 붙였는데 나설 시간이다. 코골이가 잦아지는 듯싶더니 개운한 표정으로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참 다양히도 코를 써먹는다. 내 휴식엔 온갖 훼방을 놓고는 가뜬해 보이는 그가 얄미로워 딱밤이라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 풍경의 양 떼들, 아스팔트를 걷는 발굽의 소리가 잔잔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누워있어 봤자 소용도 없으니 일찍 길을 나섰는데, 웬걸, 양 떼가 새벽 도로를 점령하고 있다. 우사에서 밤을 지새우고 오늘의 풀을 뜯으러 가는 모양인가.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양 떼가 서로 맞닿고 부대끼며 무심히 나를 스쳐갔다. 샐룩대는 양들의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설친 밤잠으로 상한 기분이 시들해졌다.

새벽하늘, 짙은 구름 사이로 덜 여문 달이 한참이었다.
앞서가는 수빈, 뒤따르는 소영

이른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종일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판초를 채 챙겨 입을 시간도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쫄딱 맞으며 길에서 만난 수빈, 소영 씨와 함께 걸었다. 함께 걷다가도 걸음이 빠른 그녀들은 새알처럼 멀어질 만큼 한동안 앞서가다는 뚝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본다. 어딘가에 걸터앉고는 내가 가까워지길 기다린다. 멀리서 봐도 해쭉 웃고 있는 모습이다. 미안한 마음에 종종거리고 다가가면 날 위해 한참을 또 쉬어준다. 내가 가자고 할 때까지.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던가. 한참 느린 나에겐 어림없는 소리다. 나와 함께 걷기 위해 그녀들에겐 얼마나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을까.


아득하게 넓은 대지 위를 홀로 걸으랬다면 광막했을 마음. 그녀들과의 동행이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홀로 걸으러 찾아온 땅 위에서 같이 걷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지. 나를 찾으러 온 여행에서 다른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지. 순례길 위로 혼자 떠나온 사람은 많지만 홀로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속도가 맞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다니며 무리를 만든다. 다른 이들이 멋대로 정의하는 나라는 존재에 몸살을 앓고 떠나온 이곳에서 왜 또다시 나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요구하는가. 그래,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 고로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 누군가를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머문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산티아고까지, 367km

이런저런 생각에 흐리멍덩해진 귓가로 그녀들의 목소리가 재잘거리며 들려왔다. 12km를 더 걸어 도착한 마을의 식당 앞에 걸음을 멈췄다. 고소한 음식냄새가 몰큰몰큰 창문을 넘어 흘러온다. 눈빛을 교환하다 결정한다. '여기서 밥 먹고 가요, 우리.' 거부할 수 없는  감각이 하나 둘 돌아오자 배가 텅 비어있던 것을 깨달았다. 걸음이 더딘 나 때문에 조금 더 늦어진 점심이었을 것이다. 파에야와 파스타를 시키니 홍합이 담뿍 올라간 음식이 나온다. 음료는 무얼로 할 거냐고 묻는 종업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인을 주문한다. 달큰한 와인향에 조금씩 달아오른 볼을 달고 다시 길에 올라 6km를 더 걸었다.


Villamoros del Mansilla에 도착한 후, Municipal(시립 알베르게, 지역 정부차원에서 운용하는 알베르게를 의미한다. 5유로 안팎으로 저렴하고 규모가 큰 경우가 많다.)에 도착하자마자 다 같이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맡긴 뒤 저녁거리를 사러 dia로 장을 보러 갔다. 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내 걷는 동안 며칠 전 내가 만들어 나눠먹었던 파스타가 화제였다. 너무 맛있었다고 연신 이야기하는 그녀들의 바람을 무시할 수 없어 저녁식사 요리를 맡았다. 두 팔을 걷어 붙여도 아무도 말리는 기색이 없었으니 듣기 좋으라고만 말한 것 같지도 않았다. 걷는 동안 음식에 대해 펼쳐진 가상의 식탁을 두고 누군가 '나는 알리오 올리오를 지-인짜 (여기서 지-인짜의 억양이 중요하다) 좋아하는데, 어느 식당엘 가든 마늘이랑 새우가 쥐꼬리만큼 있잖아. 알죠? 몇 번 건져먹으면 없는 거. 나 지-인짜 아쉬워.'라고 말했기에, 오늘만큼은 마늘과 새우 듬뿍 넣은 알리오올리오를 먹어보자며 상을 한소끔 차려냈다.

그렇게 차려진 한상, 새우와 마늘이 지-인짜 많이 들어간 알리오올리오도 함께.

26km를 걸어온 하루의 끝자락엔 어김없이 종아리가 부어오르고, 발목이 욱신거린다. 배낭에 짓눌렸던 어깨도 등도 이제사 피가 통하기 시작하고 사르르 몸이 녹아내린다. 풀리는 긴장에 하나씩 살아나는 감각을 꺼놓는 것을 와인이 돕는다. 와인이 들어갈수록 더 자주 웃음이 새어 나온다. 조잘조잘 나누는 이야기소리가 듣기 좋다. 간간히 나무 의자가 삐걱거린다. 홀로 떠나온 이들이 만드는 함께하는 소리. 눈빛과 말과 음식을 나누는 소리. 위로가 되는 소리.


Question 21. 어떤 일을 하고 싶어?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전에 난 무슨 일을 했는가. 아니, 그보다도 더 전에 '일'이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 나에게 '일'이란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많은 돈?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적 기여 혹은 자아의 실현? 나에겐 그중 '경험'이 아닐는지.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일. 그 일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지구 반대편에서 30만 년 전부터 다르게 살아온 인류의 초상을 발견하는 일.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풍경처럼 비추어 보는 일. 그리고 그 속에 잠깐 머물다가 가는 일. 마주친 누군가의 얼굴에 피로와 흥겨움이 물씬 밴 구수한 주름사이를 관찰하는 일. 그 생활감정 사이로 그들의 삶을 발견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참 잊고 살기 좋은 말이다. 하지 못해도 그만인 것처럼 들리니까. 다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서랍 속에 넣어둘 핑계가 좋다. 간간히 꺼내어보면 위로가 되는 것이 그만이다. 너무도 늦게 발견한 나의 소망을 서랍에서 꺼내어본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것을 닮은 일을 해보기로 한다. 세상을 정성껏 사랑하는 일. 그들의 삶을 여행하고 글로 적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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