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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l 22. 2024

달 달 무슨 달

story 22. 쟁반같이 둥근달

그리운 달은 그믐달,
보고 싶은 달은 보름달,
초라한 달은 초승달.

2019.11.03 (08:10) Villamoros del Mansilla - León (14:00) (20km)

2019.11.04 (--:--) León, Day off (--:--) (0km)


얕은 잠에 꿈을 자주 꾼다. 어젯밤엔 크게 도는 연촌강 옆 자갈밭에 있었다. 가마솥처럼 동그란 달이 떠 있었다. 영월이었나. 몇 년 사귀었지만 결국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가 등장했다. 우리는 펼쳐진 돌무더기 사이 맛있는 자갈을 골라 줍고는 물가에서 깨끗이 씻어 불에 구워 먹었다. 불에 노릇하게 구워진 자갈이 형형색색의 바람떡으로 변했다. 맛있게 먹었던 것 같은데 밤중에 이를 갈았으려나. 미련도 후회도 없다고 생각했던 오래전 애인이 나오다니,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밝은 귀가 야속할 뿐이다.

산티아고까지, 340km
Casa Blanca에서 오전 9시부터 즐겼던 맥주

어제 그렇게도 비가 오더니 하루 지나 매차게 부는 바람이 차가웠다. 피고 진 단풍 사이로 볕이 들기에 잠깐 쉬어갈 겸 Casa Blanca라는 카페에 들렀다. Casa Blanca라니. 하얀 집이라는 이름답게 건물부터 가구까지 모두 하얀색이다. 이른 아침의 음주는 몸을 무겁게 만들기에 걸음이 늘어져 선호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었다. 황금빛의 청량한 맥주 한 잔이어야 갈증이 달래질 것도 같았다. 주문한 맥주를 두 잔에 나누어 따르고 뽀글거리며 벽을 타고 오르는 탄산을 감상한다. 아침 9시에 마시는 맥주에 내심 흡족한 반항심이 든다. '아침 댓바람부터 술 마시는 사람'따위의 조소가 통하지 않는 시선과 규제 속에서의 열외.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간들. 관념에 속하지 않는 순간들.


소소한 허세가 채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술기운이 돌진 않았지만 맥주라는 술의 이뇨작용을 무시한 결과다. 다행히(?)도 혼자가 아니다. 번갈아 망을 봐주며 자연 화장실을 이용했다. 수풀 사이 적당하게 평평한 지점을 골라 두 발을 딛고 바지를 내린다. 하루의 일과를 향해 길을 나서던 개미가 봉변을 당한다. 미안하다고 말할 겨를도 없이 바지를 추켜올리고 흔적을 지운다. 수치를 가리고 가려 어떻게든 일을 처리했건만 10분도 미처 가지 않아 마을이 나왔다.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나의 자취가 이렇게도 헛될 수가 있나. 억울한 마음을 달래려 마을 식당에 들러 샌드위치, 핀초(pinchos, '찌르다'혹은 '꽂다'를 의미하는 'pinchar'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작은 접시에 얇게 썰어진 바게트 위로 다양한 재료가 꽂혀있다), 보카디요로 늦은 아침식사를 했다.

멀리 보이는 León. 로마 제국 시절 군사 요새였다고 한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걷다 León 초입으로 들어올 때 즈음되니 점심이 한참 지난 시간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또다시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다 같이 KFC로 향했다. 큰 규모의 마을이 아니라면 모두의 입맛에 맞추어 표준화된 체인 음식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기에 고민할 여지가 없다. 어딜 가나 현지의 맛을 경험하고 싶다고 고집했던 나의 여행 신념도 예외로 삼는 순간이다. KFC에서 감자튀김과 치킨 버켓을 한 쟁반에 와르륵 쏟아 나누어 먹는다. 초등학교 6학년 생일파티 때 마지막으로 경험해봤음직 한, 꽤 깜찍한 식사를 끝내고 아이스크림으로 2차전을 마무리한 후에 빵빵히 불어 오른 배를 부여잡고 León 시내로 진입했다.

수빈, 소영과 함께 나누어 먹었던 KFC 감자튀김과 치킨 텐더 버켓.

내일 푹 쉬어갈 생각으로 개인 숙소를 예약해 둔 탓에 사람들과 헤어지고 따로 숙소를 찾아갔다. 숙소에서 씻고 조금 쉬다가 구경도 할 겸 시내를 돌아다녔다. 스티브도 레온에 있다기에 그가 찍어준 식당 주소로 향하려는데 핸드폰이 먹통이다. 데이터가 5일 전부터 말썽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건물 기둥벽에 걸터앉아 있는데 누군가 한국인이냐 물어온다. 나보다 한참을 어린듯한 그녀는 자신을 '이나'라고 소개했다. 때마침 나타난 이나 씨의 핸드폰을 빌려 대략적인 위치를 찾았다. 마침 가는 방향이라며 그녀와 짧은 동행을 했다.


레온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 중이었다는 이나 씨가 나의 일정을 물어왔다. 내일은 푹 쉬어갈 생각이고, 원래 예정대로라면 레온에서 타투를 하려고 했으나, 아직은 조금 더 생각 중이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새어가듯 쏟아냈더니 그녀의 두 눈이 부푼다. "타투요?", "네, 순례길을 기억할 수 있는 타투를 하나 하고 싶어서요." 왜 그렇게 놀라는지?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는가.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녀가 말한다. "타투.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도 하고 싶다. 저도 할래요 타투." 적잖이 당황스럽다. 길 가다 마주친 사람, 것도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은 나 때문에 평생 몸에 남는 타투를 하겠다고? 구태여 말릴 이유도 없지만 고개가 절로 기운다. 그녀는 나와 헤어지고 곧장 근처 타투샵으로 갈 거라고 했다. 나비를 새겨 넣겠다면서. 해맑게 떠나버린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마음 한켠이 연신 찜찜했다. 하기야, 나도 그녀라는 사람을 알 수 없는 일이긴 마찬가지다. 그런 그녀가 그녀 다운 모습이겠거니 한다. '그래, 참나무는 참나무지. 참나무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지.'

León, Casa de los Botines. 가우디의 건축물이다. (1892-1893)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베이컨맨, 에그맨과 함께한 와인. Lee도 잠깐이나마 함께했다.

며칠 전 부르고스 때처럼 베이컨맨 스티브, 에그맨 스티브와 함께 Tapas에 와인을 마셨다. 두 명의 스티브가 계속해서 와인을 사 주는 탓에 한 여덟 잔 째였나. 거하게 취해버렸다. 이야기의 흐름에 잠깐 찾아온 침묵을 깨고 대뜸 베이컨 스티브가 여자친구에게 차였다고 했다. 엊그제인가 순례길을 걷는 와중에 이별 통보를 받았다고.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그보다. 잠깐만.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그는 핸드폰을 들어 한없이 늘어진 말풍선의 채팅창을 읊어가며 여자의 심리를 도대체 좀 알려달라고 나에게 닦달했지만 내가 중년의 사랑을 알 턱이 있나. 에그맨 스티브가 그를 위로하며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그렇지 않아?" 베이컨 스티브의 불만이 가득하다. "그 말을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중간에 뚱하니 앉아 두 스티브의 대화를 가만 듣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사람아, 사랑이 진실되다면 누구도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아. 자신을 가지라고 친구."


베이컨 스티브는 초조해 보였다. 그녀가 영영 떠나버릴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가슴속에 아직 희망이 남아있었나. 그녀가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가. 조바심은 희망의 다른 얼굴이며, 두려움은 소중한 만큼 강해지니까. 기대가 있었으니 실망도 있었을 것이며 만남이 있으니 헤어짐도 있을 것이었다. 절절이 바라고 원하는 그의 사랑이 내심 부러웠다. 그 생각 끝에 꼬부라지는 혀로 그를 위로한답시고 꺼낸 말이 "부럽다"였다. 방금 이별통보를 받은 사람한테 부럽다니, 이 무슨 비아냥인지. 되지 않는 영어로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사랑이란 건 흐르는 에너지이며, 그것이 흐르는 한 우리는 모두 청춘이라고 말한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다 헛소리예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스티브, 여자인 나에게 묻는다면 그녀한테 전화하는 게 좋을걸요. 옆에 있어줬으면 하고 그러는 거라고요. 보고 싶으니까." 맞다. 취기가 불러온 객기다. 가만히 있었으면 반이라도 갔을 것을.

밤에 다시 만난 Casa de los Botines.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베이컨 스티브가 유리문 너머로 보인다. 휴대폰을 귀 가까이 붙이고 한쪽 팔을 휘두르며 연신 무언가를 설명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돌연 취기가 올라 숙소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는 것도 상책인 듯싶었다. 돌아가는 길을 비추는 달빛이 형형하다. 문득 오래전 만났던 누군가 달에 대해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잔뜩 비어있는 달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그믐달과 초승달을 자주 헷갈린다고 했다. "저건 그믐달. 사람들이 흔히 초승달이라고 하는 저 달은 그믐달이야." 그는 그믐달은 그리워하는 달이라고 했다. 그믐달은 만월만큼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외로운 달이고, 쓸쓸해하는 달이라고. 보고 싶은 마음에 밤길을 비추다 커지고 커진 달이 보름달, 그래도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다 실망감에 초라해진 달이 초승달이라며 이름의 앞자를 따서 기억하라고 했다. 난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저 하늘에 남은 손톱 생채기만 같은데. 왜 공연히 마음만 어지럽히는 이런 기억들은 취기를 빌어 피어나는지.


숙소에 도착하니 자정쯤이던가. 긴장이 풀리니 술기운에 얼굴까지 왕왕 피가 솟는다. 제대로 된 음식도 없이 와인만 마셔서인지 뒤틀린 속이 나아질 생각을 않았다.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20km가 넘도록 걸어대며 몸을 혹사하는데 그 생각을 못하고 제멋대로 마셔댄 결과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앞으로 당분간은 금주라며 다짐하지만 언제까지 지켜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León, 젤리가게 혹은 반찬가게 그 중간 어디쯤의 가게

(당연히) 지독한 숙취로 잠에서 깼다. 아침 8시가 지난 시간이다. 씻고, 침구를 깨끗이 정리해 놓고 다른 방으로 짐을 옮겨놓고(이틀 밤을 머무르기로 되어있던 숙소에 창문이 없는 탓에 방을 옮겨달라고 부탁을 해두었다. 순례자이기에 지독한 냄새가 나는 양말을 빨아 널어야 한다며 그럴싸한 핑계를 댔지만 실은 창 밖을 보고 싶었던 탓이다.) 길을 나섰다. 근처 중국인 마트에 들러 양말도 사고, 먹통이 되어버린 핸드폰에 갈아 끼울 유심도 새로 사고,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현금도 조금 더 인출하고, 여유롭게 León을 거닐며 점심도 먹었다. 어제 만난 이나 씨는 결국 타투를 했을까. 베이컨 스티브는 여자친구와 화해했을까.


사실 León에서는 타투를 할 생각이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표시석에 새겨진 문양이 어떨까 싶었다. 한바탕 포부를 가졌지만 앞으로 20일가량을 더 걸어야 하는데 그사이 혹여나 성이 나버리면 어쩌지, 섣불리 했다가 후회하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이 뒤따랐기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심지어 몇 곳 알아보았더니 가격이 만만치 않다. 지레 겁을 먹어버린 마음을 달래려 근처 카페에 앉아 애 멀게 일기만 적었다. 가게들도 시에스타(La Siesta, 일반적으로 2시부터 시작된다. 짧게는 20-30분, 길게는 3시간 동안 직원들은 집에 가서 쉬거나 낮잠을 잔다고 한다.)에 들어가는 바람에 고민의 구실이 좋았다.

León, 골목에서 올려다본 청량한 하늘
간식으로 먹었던 추로스와 뜨거운 초코렛. 스페인의 전통 간식이다.

타투를 왜 하려고 했냐 하면은, 아픈 것은 기억에 오래 남기에, 흔히 말하는 '충격요법'으로의 기억을 하나 만들고 싶었던 거였다. 몸에 남는 흔적 하나 달고 오래오래 순례길을 기억했으면 해서. 그래도 섣부를 순 없는 노릇이기에, 길고 길어지는 고민을 덮고 타투 대신 귀라도 뚫어야겠다고 타협을 봤다. León에서 타투샵과 피어싱샵은 우리나라 편의점만큼이나 널리고 널렸다. 근처 Samarcanda라는 가게엘 들어가 귀를 뚫고 싶다고 말하니, 우람한 아저씨가 자신의 몸만큼이나 육중한 의자를 끌고 오더니 대뜸 앉히고는 뚫고 싶은 곳에 점을 찍으라 한다. 여기쯤? 하고 콕 점을 찍었더니 부지불식간에 귀 뚫는 총을 들고 와서는 쏴버렸다. 아, 마음의 준비가 아직이었는데. 시간차로 고통이 몰려온다. 아저씨는 아파하는 나를 보고는 익살맞게 웃는다. 얄망궂은 영감님 같으니. 그래도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귀걸이가 마음에 들었다.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봤다.

레온 대성당(Catedral de León)의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León palaza mayor. 레온에서의 만남의 광장
산티아고까지, 309km.  그 밑에 441km는 León으로부터 동쪽으로 oviedo를 거쳐 향하는 San salvador 루트
한국이 맛이 그리워 찾아먹었던 스시와 만두, 컵라면.

귀도 뚫었겠다 이제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한국의 맛이 그리워 비슷하게나마 찾아두었던 스시집(wok)이 8시에 연단다. 한국인의 배꼽시계로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식사시간이다. 주변을 배회하다 숙소로 돌아와 쉬었는데, 음식이 얹혔는지 몸이 이상하다. 열이 나고 어지럽길래 약을 먹고는 조금 괜찮아졌나 싶어 결국 저녁을 먹었더니 신물이 올라와 전부 게워냈다. 역시 언제나 건강이 최고다. 게워낸 속은 텅 비고 홀로 누운 침대가 커다란 세상처럼 넓다. 옹송그리고 누운 내가 점점 더 작아지다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따끈한 집밥이 그리웠다. 아니 그보다, 옆에 느껴지는 기척이 그리웠다. 다 컸다고 생각한 나는 이따금씩 이렇게도 작아지는구나. 그래, 까짓 거 아직 크는 중이라고 생각하자. 다치고 아프고 벗겨지고 거칠어지고 망가지고 회복하며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는 거라고.


Question 22. 너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것은?

가만 보자. 대답할 수 있나? 가장 자신이 있다고 말하려 하면 흔히 말하듯이 남들보다 잘하는 것들을 나열해야 하겠지. '그림을 잘 그린다', '노래를 잘 부른다', 혹은 '기억력이 좋다'처럼. 그 일에 특출 난 센스가 있어 남들보다 뛰어나야 할 터인데, 애석하게도 난 그런 게 없다. 뭐든 중간이다. 이 것도 중간, 저 것도 중간. 뭐든 어중간. 그래도 얼마 전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뭐든지 중간쯤 하는 것도 능력 아닌가. 사실 생각해 보면, 무언갈 잘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하나의 억압이질 않느냐고. 나의 느낌과 생각들은 강물처럼 흐른다. 대답하자면 그저 숨 쉬는 것을 즐기며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자신이 있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들에 자신이 있다. 가만 바라보는 것들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들. 남들보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서 애처로울만치 노력한 사람들을 힐난하거나 매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저 내가 남들보다 무언갈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먹히지 않는 사람인 걸.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잘한다고 비교하고 있기엔 인생은 너무 짧아. 인생이 이다지도 짧은 건 우리가 항상 세상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세상에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어중간한 나대로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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