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지 않았다면

story 27. 알지 못했을 순간들

by JJ
풍경들, 사람들, 그 속에서 섞이는 감정들, 흐르는 것들, 무언가 태어나고 자라며 사라지는 것들...

2019.11.09 (07:40) Ponferrada - Viafranca del Bierzo (15:30) (25km)


어젯밤, 깊은 새벽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물을 마시러 가는 길이 천리길이라 눈을 감고 된 침만 삼키고 있는데 흐릿한 공간을 울리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 그 소리를 포개는 소곤거리는 말소리. 아, 기도소리. 어느샌가 잠에서 깬 이유도 잊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살아있는, 그래서 마치 호흡처럼 숨길 수 없는, 부풀어지는 갈비뼈와 색색거리는 숨소리 같은, 살아있는 감정의 소리에. 그렇게 깨어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새벽에 얼마간 뒤엉키고 혼란하며, 또 얼마간 다채롭고 요동치는 순간을 만났다. 새벽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고 갈증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Ponferrada의 Castillo de los Templarios 성, 중세 시대 순례자들을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Ponferrada를 떠나던 다리 위에서. 자욱한 안개가 수풀을 뒤덮고 있다.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니 미처 물러가지 못한 안개가 자욱하다. 커다란 성벽의 외각을 따라 걸어 Ponferrada를 빠져나왔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공기가 예사롭지 않더니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는 뚝, 하고 멎었다. 그리고 또다시 쏴, 그리고는 뚝. 알다가도 모를 날씨다. 마을을 나서는 초입길부터 어제 만난 카를로와 함께 걸었다. 어제는 저녁이라는 시간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가 언어의 장벽을 조금 투명하게 만들어 주었으나 아침이 오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순례길을 걷는 내내 '너네 나라 말로 뭐야' 챌린지를 계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도 그렇거니와, 사실 모든 행동이 나를 위한 배려로 기울어져있는 그가 조금 불편했다. 그는 나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돌아보고, 살피고, 우려했다. 나를 위해 신경 써주는 사람이 익숙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었다.

오늘 걷는 25km, 완만한 길.

오늘의 길은 비교적 평탄했으나, 여러 번의 갈림길이 이어졌다. 조금 빠르고 편한 길들은 큰길로 이어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름길로 난 길을 따라 사라졌다. 혼자 걷던 길 위에 또다시 혼자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길 위에 덩그러니 나 홀로 남은 꼴이 되었다. 외롭긴 해도 마음을 따라가기 좋은 시간이다. 문득 글을 쓰고 싶어지면 포도밭 사이에 멈추어 서서 글을 적었다. 순례길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조차 생각하게 되는 곳. 문득 내가 적고 있는 것조차 왜 적는가 싶었다. 무엇이 날 쓰게 하는가. 생명을 향한 연민을 위해 글을 적는다고 소설가 박경리는 말했다. 그럼 난 도대체 무얼 위해? 그런 밀도 깊은 짙은 사랑에 대한 숭고한 정신은 난 미처 흉내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난 무슨 마음으로? 생각 없이 적어 내린 일기의 앞단을 되짚어 읽어본다. 어두운 새벽을 밝히던 기도소리, 카를로의 사려 깊은 눈동자,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포도밭에 대하여 적었다. 누군가와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그들을 그들답게 만드는 작은 몸짓들을 뒤이어 적었다.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들에 대하여 적었다. 풍경과 사람들, 그 속에서 섞이는 감정들, 흐르는 것들, 무언가 태어나고 자라며 사라지는 것들... 그래, 이런 것들을 느끼고 있으니 빠른 길을 택한 다른 이들보다 느린 것은 당연하나 뒤처지지는 않을 테다. 내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 나만의 풍경을 발견하는 일. 발로 생각하고 손으로 적는 일. 나의 순례길을 걷는 일.

포도밭을 가로질러 나있는 길, 덕분에 사방이 포도밭이다.

실로 포도밭이 사방 온갖 곳에 있었다. 10월 초까지 수확을 마쳤을 텐데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포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나뭇잎에 단풍이 든다. 포도의 색을 따라 저물어가는 붉은 잎들이 한 차례 바람이 불면 스치고 흔들리며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기에 마른땅이 보일 때마다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긴 시간 동안 쉬어갔다. 길어지는 일기와 풍경을 따라 걷다 보니 25km의 거리가 멀지 않게 느껴져 다음 마을까지 조금 더 걸어볼까 싶었으나, 그저 경유지로만 스쳐가기엔 Viafranca del Bierzo 마을의 풍경이 너무 예뻤다. 마침 올해 초에 방영했던 '스페인 하숙' TV 프로그램의 배경이 된 숙소가 있는 곳이다. 왜 이 지역을 특별히 의도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TV에 나온 숙소는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찾아가 보자 싶어 걸음을 멈췄다.

Viafranca del Bierzo 초입의 풍경

그 프로그램이 순례자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숙소 대문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이미 도착한 사람들의 인증샷 포토존이 되어있었으니까. 하긴 마땅히 순례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얼마간 벼르기도 했을 것이었다. 프로그램을 챙겨본 적도 없거니와 그렇기에 당연히 인증샷에 관심이 없는 나는 멋쩍게 인파를 뚫고 들어왔고 TV에 나왔던 곳에 당도한 감격보다는 큰 부엌을 보고 흡족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오늘 저녁은 저 큼직한 접시들을 깨끗이 닦아 성대한 만찬을 차려 먹으리. 씻고 근처 마트에 들렀다가 마침 칠면조 고기가 할인을 하기에 사들고 돌아와 먹음직스럽게 구워다가 샐러드와 함께 한 상을 만들어냈다. 아, 와인도 물론 함께.

오늘의 저녁식사. 칠면조고기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

예쁘게 차려진 접시를 앞에 두고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차에 하나둘 몰려드는 다른 순례자들을 만났다. 음식을 나누고 와인잔을 비우다 보니 오늘도 역시나 과음을 했다. 그들 중엔 감자씨도 있었는데, 역시나 예사롭지 않은 행동의 그는 당당히 다가와 나에게 칠면조 고기 한 조각을 요구했다. 맡겨놓은 듯한 태도에 미처 거절할 수 없어 한 조각을 나눠주었(혹은 뺏겼)다. 그토록 본인의 고집대로 살아갈 수 있다니. 오늘은 그가 밉기보단 재밌었다. 어떻게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달까, 아무래도 그의 뻔뻔한 매력에 미운 정이 들었나 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몇 사람들이 근처 바에 축구경기를 보러 간다며 자리를 일어선다. 이미 배는 불렀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하거니와 이대로라면 감자씨와 둘이 남겨질 위기이기에 그들을 따라나섰더니 바테이블을 꿰고 앉아서는 보라는 축구경기는 안 보고 서로 이야기만 주고받는다. 그탓에 또 연거푸 맥주잔을 비우니 빙글빙글,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웠다 하면 까무러치고는 며칠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체력이 이렇게들 좋다니. 대뜸 따라나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내가 야속해진다. 그들은 바에서 숙소로 걸어오던 시간 동안도 한참을 우뚝우뚝 서서는 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눴다. 숙소 앞 대문 앞에서도 몇몇이 담배를 꺼내 태운다며 이야깃거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언제 타이밍을 보고 자리를 뿌리쳐야 하는지 그 틈이라는 것을 자주 놓치는 나는 어중떠중으로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이야기에 집중하는 척하며 속으론 감자씨와 같은 방을 쓰게 될 그들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엎드려 후레시를 비추고 일기를 적었다. 그들은 지금쯤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 있으려나. 모쪼록 편안한 밤들 되길. buenas noches, hasta mañana, 내일 만나요.


Question 27. 다시 가고 싶은 마을이 있어? 이유가 뭐야?

Estella, 날개 없는 천사 Hosé 아저씨를 만나고, 순례길 위의 많은 의미들을 마주했던 곳.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아직은 어색한 순례길 위에서 발 닿는 곳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감정들을 떠올렸던 곳. 사실은 지났던 모든 마을들이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뒤돌아 다시 그 먼 길을 걸어 돌아가라 이르면 기꺼이 그렇게도 하겠다. 실제로 순례길을 걷다 보면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이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무언가 잃어버렸거나 알베르게에 두고 온 탓에 뒤돌아가는 걸까, 하고 의아하게 바라보면 태평하게 웃으며 'buen camino', 하고 인사를 건넨다. 몇 번을 그러다가 도저히 궁금해서 못 견딜 때 즈음이 되어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이를 붙들고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딜 향해 걷고 있느냐 물었더니 산티아고 대성당을 지나, 땅 끝 마을 Fisterra에 도착하고는, 다시 뒤돌아 왔던 길을 되짚어 Saint Jean으로 간다고 했다. 1,000km를 걷고 또다시 1,000km를 걷는 이들의 발바닥은 어떤 형태이려나. 그는 인사를 건네고는 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점차 멀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작아진 그가 연신 손을 흔든다. 그가 도착했고 또 떠났으며 지나쳐온 산티아고를 향해 흔드는 손일까. Estella에 다시 도착한다면 Hosé 아저씨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지나오며 만났던 나의 모든 인연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