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대현 Oct 22. 2021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학책이다. 원래 난 문학이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읽은 대부분의 책은 비문학이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장르도 좋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작품 때문이다. 삶의 여러가지 부분을 생각하게 만드는 동시에 웃기고 재밌기까지 하다.



이 책은 사실 줄거리라고 할 것이 크게 없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책이 구성 되는데, 주인공이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주인공은 미국의 상류층 자제이다. 팬시라는 기숙학교에 다니는데 엘리트들만 다닐 수 있으며 돈이 아주 많이 드는 학교이다. 주인공의 집이 뉴욕에 있고 아버지가 변호사라는 것을 미루어 봐도 그의 배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주인공인 홀든은 그 학교에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퇴학을 당하게 된다. 홀든은 퇴학을 당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어차피 학교의 모든 것이 다 싫었기 때문이다. 기숙학교였기 때문에 학기가 끝나고 짐싸서 나가기 전까지 그곳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룸메이트와 싸우다가 두들겨 맞고 나서 홀든은 그날 바로 짐을 싸서 나와 버린다. 수요일에 홀든에 대한 편지가 부모님께로 전달되는데, 홀든은 그 전까지 뉴욕의 호텔에서 머물러 있기로 작정한다.



홀든은 기차와 택시를 타고 뉴욕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호텔에 머문다. 외로워서 클럽에 가서 거기 있는 여자들이랑 춤을 추기도 하고, 술집에 가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홀든의 눈에는 모두가 가식적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전부 좋아하지는 않는다. 또 홀든은 엘리베이터에서 포주에게 성매매 제안을 받기도 한다. 결국 홀든은 창녀를 호텔 방으로 불렀는데, 창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자 홀든은 성관계를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대화만 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창녀는 빨리 일을 끝내고 가고 싶어한다. 결국 홀든은 처음 포주와 이야기 했던 대로 5달러를 주고 보내려고 하지만 창녀는 10달러를 주라고 한다. 홀든은 5달러 이상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5달러를 주고 돌려보낸다. 결국 창녀는 포주를 불렀고 포주는 홀든을 구타하고 5달러를 지갑에서 더 가져갔다.



이후 홀든은 자신의 여자친구인 셀리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와 데이트를 하기도 하지만 결국 아무말이나 내뱉다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진다. 홀든은 평소에 샐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만날 사람이 없어 샐리를 불러내 만났는데 만나는 동안에는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좋아했다.



홀든은 바에 가서 여러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도 나눴지만 그들의 가식에 염증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동생인 피비를 보러가기로 결심한다. 홀든은 부모님이 없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 틈에 피비 방에 들어가 피비와 이야기를 나눈다. 피비는 자고 있다가 홀든이 깨워서 일어났으며 부모님이 들어와 다시 몰래 집을 나갈때 자신의 용돈을 홀든에게 준다. 홀든은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홀든은 안톨리니라는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선생님 집으로 찾아간다. 그는 홀든이 좋아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선생님은 홀든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며 현재 홀든의 상황을 듣고 나름대로 좋은 충고도 많이 해준다. 그런데 홀든이 자고 있을 때 그 선생님이 홀든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홀든은 깜짝 놀라 일어나서 바로 그 선생님 집 밖으로 뛰쳐나온다. 홀든은 자신이 변태 같은 짓을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홀든은 결국 지하철 대합실에서 잠이 든다. 홀든은 원래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이제 서부로 완전 떠나버릴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피비에게 돈을 다시 돌려주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 피비가 다니던 학교이자 자기가 어렸을 때 다니던 학교를 찾아간다.



하지만 피비는 자기를 두고 떠나려는 홀든에게 화가나고 홀든은 피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동물원을 데려간다. 거기서 홀든을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그리고 홀든은 이 모든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에게 이야기하며 상담을 하고 있었다.


명대사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합 같은 소리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축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축에 끼게 된다면, 잘난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인생에는 룰이 없다. 사실 규칙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부분 잘난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 난 인생은 규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떤 룰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룰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는 법이다.



이상하게 연주가 끝났을 때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주가 제대로 된 것인지, 
틀린 것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건 완전히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일부 저렇게 열렬히 환호를 보내고 있는 멍청이들의 책임도 큰 것이다.


홀든은 어니의 피아노 연주가 역겨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보고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그런 환호를 들으며 어니는 뿌듯해 했지만 홀든은 오히려 그런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니는 자신이 피아노를 잘 쳤는지 아니면 형편없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니를 그렇게 만든 데에는 무조건 환호를 보내주는 멍청이들의 책임도 있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 가지인 것 같다.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연연하게 되면 객관적인 판단을 오히려 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 사람들은 때로 칭찬 받아야 할 때 비난을 하고 비난을 받아야할 때 환호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항상 겸손하게 발전하려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도 주제를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거기에만 충실한 것도 싫습니다.


홀든은 규칙의 노예가 되어버린 학생들을 묘사한다. 홀든이 보기에 리처드 킨셀러라는 친구는 매력적이고 재밌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의 연설이 주제에 벗어나는지 그렇지 않은지만 찾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주제에 벗어나면 '탈선!'이라고 외쳐댔고 결국 그 아이는 낙제하고 말았다.



말을 하다가 주제에 좀 벗어나면 어떤가. 이야기가 재밌고 유익하다면, 또 이해하기 쉽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규칙이라는 것은 우리가 더 발전하도록 도와줘야한다. 발전을 저해하는 규칙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규칙이다.




넌 지금 일말의 가치도 없는 일로
고귀한 죽음을 감수하려는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야.

세상에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항상 까먹는 것 같다. 난 생명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학업 성적 때문에 목숨을 던져버리는 학생들도 있고, 돈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종교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사람도 있고, 정치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내가 그 사람들의 선택을 판단할 자격은 없다. 그런데 난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 사람 목숨 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학업도, 돈도, 종교도, 정치도 결국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걸까?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해보기 전에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해보기 전에 어떻게 될지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무조건 가능할 것 같은 일도 막상해보면 생각 이상으로 어려울 수가 있고 절대 안될 것 같은 일들도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닌 경우가 많다.



내가 해보지 않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는 행위는 최대한 자제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몇 번을 읽었지만 이번에도 킥킥 대면서 재밌게 잘 읽은 것 같다. 번역을 하게 되면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원본의 느낌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움이 있긴 했다. 실제 호밀밭의 파수꾼 원서를 보면 노골적으로 욕이 나오고 외설적인 내용도 많이 나온다. 그런데 번역이 되는 과정에서 그런 부분들이 많이 순화되었고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재밌었던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