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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Aug 12. 2023

하루를 끝맺는 일기 쓰기

자기 전에는 늘 일기를 쓴다. 매일 다른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지만, 매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금요일 밤을 바라보며 일주일을 견디고 열심히 지낸 것 같지만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을 때, 지난 일기장을 들춰보면 힘들었던 시간 속에서도 매일 열심히 고민하며 살아냈던 흔적을 발견한다.


숙제가 아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대학교 졸업 후 괴로웠던 어느 날이었다. 큰 꿈을 안고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과 수업을 들으며 내가 전공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공으로 배우던 패션 대신 책에 관심이 생겼고 출판의 길을 걷고 싶어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취업 성공 패키지를 통해 디자인 학원에 다녔다.


학원에서 처음엔 재밌게 배웠는데 점점 그 시간이 힘겨워졌다. 시작은 반장이었다. 자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뽑기를 했다. 1번이 적힌 종이를 뽑는 사람이 당첨이었는데, 뽑기 운이 없는 나는 1번을 뽑아버렸다. 반장이라는 이유로 별로 가고 싶지 않은 회식을 주도해야 했고 학원 관계자분들과 인터뷰도 하며 괜한 부담감이 더해졌다. 기초 이론을 배우고 나서는 수업도 점점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디자인 품목별로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식으로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배워가고 싶었는데, 그런 설명 없이 인증을 위한 작업물을 무작정 만들고 짧은 피드백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다 보니 매주 배운 걸 인증하기 위한 작업물을 만들어야 했는데, 점점 내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인증할 작업물을 만들기 위한 수업을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시스템에 불만이 생겼다.


모든 것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4년간 배운 전공을 내려놓고 새로운 분야에 취업하기 위해 큰맘 먹고 학원에 등록한 건데 원하는 방식의 수업도 아닌 데다가 피드백 받기까지도 오래 걸리다 보니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다. 나와 맞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낯선 분야라서 그만두기에는 앞이 막막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학원 선생님에게만 내 취업이 달린 것 같아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당시 핸드폰에 스트레스 지수 측정기가 있었는데, 학원에서 측정해 보니 스트레스 최고치를 달성하기도 했다. 학원 가는 길이 너무 괴로워서 지하철 환승하는 역에 앉아서 이대로 다시 집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돌아보면 그 시스템 속에서도 잘 적응해서 좋은 포트폴리오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유난히 그런 상황에 취약했고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던 것 같다.


학원이 종로 3가에 있어서 바로 옆에 청계천이 흘렀다. 점심시간마다 같이 수업 듣는 옆자리 동생과 청계천을 걸으며 학원 스트레스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그 동생이 먼저 학원을 그만뒀고,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예쁜 노트 하나를 샀다. 그 노트에 나의 괴로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누군가에게 쉽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노트에 빼곡히 적었다. 매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내면서 ‘학원 그만두면 나는 끝이야’라는 생각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기를 쓰며 조금씩 두려움에서 벗어나 캄캄하게만 보였던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나오니 나를 괴롭게 하는 학원은 그만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행에 옮겼다. 잃었던 희망을 되찾았고 내일을 기대하게 되었다.


여전히 하루가 힘겹게만 느껴지는 날이 자주 찾아온다. 일기 쓸 힘조차 없어서 다음날 밀린 일기를 대충 한 단어로 채워 넣는 날도 있다. 그렇지만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일기 쓰는 시간은 오늘 내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내일의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응원을 보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에게 응원을 보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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