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받으면 열심히 걸어 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생 때는 성북천을, 첫 직장에 들어가서는 서울숲을 열심히 걸었다. 나름 나만의 코스를 만들고 스트레스 지수에 따라 걷는 코스가 달라졌다. 자연 속에서 걸으면 평소에 모니터만 보던 내 세상이 넓어지는 것 같고, 복잡했던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어 좋았다.
일정이 있으면 나가서 걷는 것을 참 좋아했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었다. 씻고 옷 갈아입고 북적이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다 일처럼 느껴졌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다. 늦은 밤에 배가 고픈데 집에 먹을 게 없으면 일찍 잠에 들어 배고픔을 잊기도 하고 어떻게든 집 안에 있는 것들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절이 바뀔 즈음 되어 코트를 세탁소에 맡겨야 했다. 날이 따뜻해지고 해가 길어져 퇴근하고도 밝아서 큰맘 먹고 퇴근 후 세탁소를 다녀왔다. ‘퇴근하고 집에 들렀다가 외출했던 게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짧은 세탁소 외출을 다녀오니 너무 개운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퀘스트를 깬 기분이었다. 며칠 뒤에는 화분 분갈이에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퇴근 후에 다이소도 다녀왔다. 한번 외출에 성공하고 나니 ‘이게 왜 이리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매일 외근해서 노트북과 아이패드, 충전기 등을 들고 다녔기에 안 그래도 고단한 삶이 더 무겁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지갑만 들고 간단하게 외출하는 것에 해방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가끔 목적 없는 산책을 하러 나갔다. 골목길을 다니다가 몰랐던 가게도 발견하고 뜻밖의 노을 명소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한 발짝 나가는 것이 어떤 것보다 어려운 순간이 있다. 때로는 좋은 것을 얻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산책하면서 느낀 건 내가 정말 이 도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도 다 낯선 곳이었다. 집 밖으로 잘 안 나가다 보니 살았던 기간은 오래되었지만, 이 도시와 친해질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낯선 도시에 적응하려고 고군분투하게 되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귀찮다는 핑계로 산책을 멀리했었는데, 다시 집 밖으로 나가서 누구보다 이 도시에 오래 살았던 자연과 먼저 친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