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온 반가운 손님, 과도기
어느새 (전형적인?) 대학생활의 반을 넘어서, 3학년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있다. 항상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졸업 후를 생각하면 뭘 해야 할지 더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다. 서른이면 '찐'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의 서른은 그들의 상상처럼 찐 어른일 거라고만 믿었다.
그렇게 낙관하며 불안함을 물리치다가, 2년 전에 쓴 글을 꺼내보았다. 글을 읽고 나니 어쩌면 성인이 된 후 나의 삶은 항상 불안정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흔들림도 즐겨보겠다고 다짐하며 19년 9월 작성한 글을 가져와본다.
과도기
한 상태에서 다른 새로운 상태로 옮아가거나 바뀌어 가는 도중의 시기
이 단어가 지금의 내가 직면한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옮아가기 전의 상태는 공학자를 꿈꾸는 나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만을 꿈꾸며 살아왔다. 죽기 전까지의 인생으로 보면 짧다고 하겠지만 내 짧은 평생 동안 과학자, 공학자를 꿈꿨다. 과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고등학교에서 보낸 3년은 내가 그 꿈을 더욱 확고히 하게 했다.
고등학교 생활 중 내가 가장 큰 노력과 시간을 쏟았고, 가장 행복하고 즐겁게 보낸 시간은 동아리 친구들과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이다. 앱을 제작하는 연구였는데, 설문조사를 하다 장애인 협회장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생각보다 사회는 장애인과 약자에게 더 무관심했고, 연구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학교로 돌아오며, 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공학을 이용해서 사회적 약자의 생활이 편리해지게 돕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의 학과 진학을 목표로 잡았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20살이 된 나의 인생 목표는 18살 여름의 내가 정한 목표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입학의 목표는 이뤄냈지만, 1년 반 만에 다시 만난 꿈은 생각만큼 반갑지 않았다. 대학에서 처음 맞은 학기의 혼란스러움과 힘든 시간이 꿈을 이루겠다는 기대나 의지를 잊게 하기도 했지만, 이 꿈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학과 필수과목에는 한 학기 동안 ‘나’에 대해 알아가는 수업이 있었고, 그 수업의 과제나 발표들을 통해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방학을 맞아 나는 내 꿈에 관련된 활동을 해보기로 했고 연구실에서 연구 참여를 했다. 두 달 동안 연구에 관련해서도 많이 배웠지만, 그보다 두 달의 시간은 내가 옮아가거나 바뀌어 갈 새로운 모습을 마구 상상해보게 했다.
방학 동안 내가 연구가 그리 재밌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교수님의 분야나 연구 주제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직접 겪어본 연구실 생활은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했던 프로젝트와는 달랐다. 코딩하는 순간순간은 재밌었지만, 프로그램의 성능을 향상하는 데는 큰 흥미가 없었다.
공학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나의 꿈이었는데, 인생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꼭 생활환경을 개선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불꽃놀이를 보면서도,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 순간을 함께한다면 함께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공학이 아닌 다른 것들에도 지금까지 해왔던 만큼 사랑과 노력을 쏟고 싶어 졌고, 특히 연극에 그 마음을 주고 싶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나는 항상 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나 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연극 무대에 설 기회가 있으면 항상 도전했었다. 나는 드라마와 영화, 책처럼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걸 관객들 바로 앞의 무대 위에서 풀어내는 연극이라는 예술을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발표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수줍은 아이가 남들 앞에서 연기를 잘했을 리가. 그런데 이제 하고 싶다는 의지가 용기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커졌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며 무대 위에서 뛰노는 배우들이 너무너무 행복해 보였고 나도 그러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소질도 없고 19년을 한 길만 보고 달려온 내가 갑자기 불안정한 길을 선택하려니 걱정이 들었다. 새로운 상태를 찾았는데, 바뀌어 가기엔 두려움이 앞섰다.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될 때에는 새로운 길을 찾아봐야 하는가의 조급함이 있었지만,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며 인생에서 처음 맞은 과도기를 즐겨보기로 했다. 내가 하고 있던 공부를 계속하면서 연극 동아리에서 정기공연에 배우로 참여해 연극이 나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몸담은 분야의 일들도 생겼다. 방학에 참여한 공모전을 계속 진행하기로 했고, 선배의 추천으로 공부하고 싶던 분야의 스타트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모두 참여하기엔 시간이 부족해 보였지만 나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도전하기로 했다.
개강하고 한 달 하고 열흘이 채 안 지난 지금의 나는 오전엔 영어와 수업 공부를 하고 수업을 들은 후 오후엔 인턴 생활을, 밤엔 연극 연습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만 자고 고3 때도 챙겨보던 드라마도 포기하면서 정말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은 과도기는 인생에서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고 있다. 내가 옮아갈 새로운 나의 모습이 어떨지, 연극을 하게 될지 연구를 계속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에게 온 과도기가 너무너무 반갑고 이 순간들이 즐겁다.
2년 전의 나를 만나고 나니,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이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선 미래를 걱정하는 나에게 퉁명스러운 위로를 던졌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예상되는 삶을 살았다고 그래?', '넌 원래 그 순간 하고 싶은 대로, 즐거움을 택하며 살았잖아.'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