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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Mar 28. 2024

운이 좋았던, 독일 미대 입시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니, 드는 생각들...

베를린의 두 번째 해는 제일 중압감이 컸던 해였다. 년 초에 바이센지 미대에 떨어진 나는 함부르크 미대에 입시 전에 교수가 나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피드백을 주는, 마페베라퉁을 갔다. 독일은 미대마다 학교들이 원하는 스타일이 각각 다른데 (그 당시 몰랐다), 나의 포트폴리오는 교수님이 원하는 전혀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는 슬슬 불안해졌다. 올해 못 가면, 한국으로 돌아갈 처지의 나는 독일 미대를 나와서 강사일을 하는 한국인 선생님께 마페베라퉁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독일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여러 가지 탐구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나는 여러 가지 주제로 작업을 해온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해온 작업에서 잡을 수 있는 몇 가지 주제를 잡고, 추가로 나는 작업을 더 했다. 


지금은 다른 분야로 일하지만, 그때는 타이포그래피로 별 작업을 했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작업을 보고 베를린보다는 슈투트가르트 미대에 더 맞는 스타일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베를린이 좋았기 때문에, 바이센지와 같은 Hochschule이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베를린에 있는 다른 공립 미대에도 지원을 하게 되었다.


미대마다 포트폴리오와 학교가 내준 숙제를 제출해야 하는데, 나는 우데카나 바이센지를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 학교의 숙제에 그렇게 큰 공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가 내준 숙제를 위해 내가 만드는 작업과 그동안 했던 나의 포트폴리오가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기억나지만, 이 학교에 앞서, 포츠담의 학교도 지웠했었는데, 면접 시, 나의 마페는 마음에 드는 눈치였지만, 숙제에서 영 꽝이라서 떨어졌다. 숙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당시 정치적인 주제이였는데, 그 주제에 파악이 좀 덜 된 나에는 뭘 표현할지 영감이 부족했다.


마페를 통과하고 그 베를린의 공립 미대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면접도 봤다. 그때의 나는 독일어를 아주 잘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알고 있는 독일어와 영어를 동원해서 면접을 봤다. 그 당시는 학교 합격하고 학교가 원하는 독일어 성적을 만들 한 학기의 시간을 더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다른 것은 다 기억이 안 나지만, 면접 마지막에, 독일어는 계속 잘 배우겠습니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운이 좋게 나는 그 학교에 합격을 했다. 하필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받은 합격 소식이라서 더 좋은 생일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우데카 입시가 있었는데, 우테카는 떨어졌다. 그때 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한인 사장님께서 그래도 내가 들어간 학교가 취업은 더 잘된다고 위로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내가 단 한 군데 합격한, 이 학교에 입학하려 했지만, 이 학교는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다. 인턴쉽을 해야 했다. 대학교도 가지 않았건만, 그전에 인턴쉽 경험이 있어야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모든 디자인 회사에 공짜 인턴쉽을 문의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인턴쉽은 베이비시팅 같은 것인데, 언어가 잘 안 되는 학위도 없는 외국인이, 지금 보면 눈도 뜨고 못 봐줄 실력의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인턴쉽을 문의한다면 받아줄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운이 정말 좋게도, 막판에 그 당시 세 들어 살던 할머니 지인의 미술학원에서 인턴쉽을 할 수 있었다. 6살 미만의 애기들을 가르치는 수업 보조일을 했다.


여차저차해서 나는 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동안 베를린에서 만났던 자유롭던 사람들과 한국의 대학교 시절을 생각한 나는 재미있는 대학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때의 나는 역시나 한국에서 처럼 내가 원하는 대학은 항상 입시에서 떨어지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간 그 공립 대학에서 일 년을 다닌 시점에, 편입 준비도 했었다. 나는 슈투트가르트 미대와 우데카를 다시 지원을 했다. 슈투트가르트 미대는 마페통과도 하고 따로 시험도 보러 가서 보고, 면접도 봤지만, 아쉽게도 1점이 부족해서 편입에 성공하지 못했다. 우데카는 마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후에, 우데카는 미련이 계속 있어서, 대학원 지원을 할 때 다시 도전했지만 가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간 대학에서 흥미가 있는 분야를 찾았고, 그 분야가 잘 풀려서 나중에 취업준비비자의 기한 안에 취업할 수 있었다. 내가 그 당시에 목표로 삼은 것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해도, 계속해서 나의 길을 가다 보면, 플랜 B가 예상하지 못한 더 좋은 길을 열어 줄 때도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부분은 지금도 잊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이다. 어찌 보면 우연하게 들어간 학교가 나의 길을 더 정해준 면도 없잖아 있다. 


대학원까지 다 졸업하고, 취업해서 남의 돈 버는데 바쁜 지금의 시점에서, 그때의 교수님들의 결정이 참 맞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데카가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었다. 나의 작업들은 예술보다는 상업적이 면이 더 강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뉴질랜드에서 디자인의 첫걸음을 뗄 때, 이미 상업적인 면이 강한 곳에서, 나는 공부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냉정하게 지금 보면, 그 포트폴리오는 좀 더 취업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 만드는 포트폴리오였다. 그 당시의 나는 뭣도 몰랐지만. 우데카나 바이센지를 갔다면, 디자인을 작가로서도 잘 풀어갈 수 있는 관점을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는 바이센지나 우데카를 잘 모르는 내가 그저 우데카의 작품전시회(Rundgang)를 보고 하는 추측일 뿐이다). 지금의 독일 미대 입시와 미대는 어떨지는 나는 모른다. 뒤돌아 보니, 나는 그 당시 그 학교들이 원하는 분위기의 포트폴리오에 대해 잘 몰랐고, 또한 내가 그 분위기를 추구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렇게 만들 수가 없었다.


몇 년 후의 나의 경험으로는, 작가나 교수가 되는 것이 아닌 취업을 하려 하니, 내가 취업하려는 분야에서는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보다는 나의 실력이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 타이틀에 눈이 가는 것은 처음 취업 때 1초쯤 정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 뒤로 이직할 때는, 나에게 학교 타이틀은 전혀 중요해지지 않았다.


물론, 최근에 순수미술로 우데카를 나와서, 작품 전시회를 교수님, 동기들과 연 동료를 보고, 부러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일단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하나부터 충실하고 있다, 나에게는 이것도 쉽지 않기에. 과거의 나는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했고,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다시 그 입시 준비와 대학교 초반 적응을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다시 법학과를 가기 싫으면서, 독일 미대 준비를 베를린과 포츠담에 있는 학교로 네 군대만 했던 것도 미친 짓이었다.



그때의 입시를 위해 했던 작업들에는 애증이 남아 있어서,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구석에 박아두고 있다. 포트폴리오를 디지털이 아닌 원본으로 내야 되었기 때문에, 큰 하얀 종이를 사서 작업들을 얼마나 붙였었는지 모르겠다. 학교가 마페를 언제 돌려줄지 모르기 때문에, 미대 입시 일정이 비슷하면, 한 작업을 하나 더 같은 걸 만들기도 했다. 그걸 A1 크기의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서, 직접 학교에 내러 가기도 했고, 마페베라퉁을 받으러 가기도 했다. 나는 베를린만 했지만, 독일 전역으로 미대를 지원한다면, 각기 다른 미대 입시 일정에 맞춰 작업을 보내는 것도 큰 일일 것이다. (오래 전의 경험으로, 지금의 입시 사정은 모른다)


최근에, 작업은 따로 떼고, 작업 붙이는데만 쓴 큰 하얀 종이들만 모아서, 다른 데에 기부했다 (그 종이들은 애기들 미술수업에 여기저기 쓰인다고 한다). 버리지도 못하고 가지고만 있는 오랜 마페 작업들은, 몇 년이 더 지나야 버려도 될 만큼 의미가 덜 해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작업물의 완성도가 부끄럽긴 한데, 나름 고생한 그 시간들을 잊고 버리기 아까워서 아직은 끌어안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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