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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Mar 28. 2024

첫 해의 베를린

불분명한 미래 앞이었지만, 좋았던 시절

운 좋게 내가 여행할 시기에 사립 미술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집했고, 나는 나의 가능성도 시험할 겸, 내가 뉴질랜드에서 일 년 동안 배우고 만든 것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서, 한국으로 치면 시각디자인(Communication design) 전공으로 사립 대학교에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당연히 이곳의 학비는 한국의 미대만큼 비쌌다. 나는 부모님께 여기 말고 준비해서 공립 대학교를 지원해서 베를린에서 미대를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사립 미술 대학교 합격장 덕분에, 부모님도 허락하셨고, 베를린에서 2년의 유학생준비비자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사립 미대가 아니라 공립 미대에 지원하려면 10개월쯤의 시간이 남았었다. 공립 미대도 사립 미대처럼 잘 되겠거니 하고, 좀 안일한 첫 일 년을 보냈다. 나는 그때 우데카 아니면 바이센지 미대를 가고 싶어서, 다른 미대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독일어 수업을 듣고, 작업을 더 하고, 베를린에서 다른 친구들이랑 여기저기 주말마다 놀러 다니던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원 없이 놀아서 그런지, 그 뒤로는 유흥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졌다. 한 번은 폴란드에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갔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그 당시 입장이 무료인 페스티벌이었다. 날씨는 엄청나게 더운 여름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늘어졌던 캠핑 텐트는 지금 생각해 봐도 인상적이다. 

이제는 돈 주고 가라고 해도 못 갈 것 같은 페스티벌이다.

그때의 나는 분명 불분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텐데, 지금 뒤돌아 보면, 뉴질랜드에서 일 년, 베를린에서 첫해가 제일 좋았던 시절인 거 같다. 처음 집을 떠나 독립해서, 좌충우돌하며 대충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과정에 크게 스트레스 없이 삶과 목표를 즐겼던 시기로 나에게는 기억이 된다. 


그렇게 좋은 한철을 보내고, 그 다음 해에 초에 준비를 했다고 했는데, 바이센지 미대에 떨어지고 나서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나는 참 대책이 없고 무모했다. 독일어도 하나도 못하면서 나는 도전을 했다. 그때 주변에서는 독일어도 하나도 못하는 애가 대학을 독일에서 가려한다니 우려의 말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처음에는 하면 된다의 마음 가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독일이라고는 자동차, 맥주, 소시지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는데, 그만큼 한국에서 다시 법학과가 다니기 싫었나 보다. 그 에너지로 베를린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미대입시를 준비했다. 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남들에게 비칠지 몰라서, 내가 연락을 더 이상 안 하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나중에는 아주 외로웠다. 나 스스로가 결정하고 밀어붙인 일이라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이, 뭐라도 해내야 되는 중압감이 있었다.

 

또한 베를린에서의 사람들은 파도와 같았다. 독일어로 올바른 표현은 아니지만, 나는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은 파도와 같이 항상 왔다 가는 물이라고 생각한다 (Komm und zurück Wasser). 서로 인연이 닿을 때는 같이 놀았지만, 서로 베를린에 온 목적이 다들 다르기 때문에, 만난 인연들이 흩어지기가 쉬웠다. 특히 나는 유럽친구들과 달리 비자에, 정해진 시간 내에 대학을 가야 된다는 압박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내 목표에 몰두하다 보니, 나에게 온 소중한 인연들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베를린에서 이방인의 쓴맛 단맛을 다 보고 있어서 그런가, 지금의 나라면 아마 다시는 다른 나라에 가서 갑자기 살기로 도전하지는 못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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