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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Mar 14. 2024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하지만 필요하다

뉴질랜드 이야기

뉴질랜드에 가기 전까지 나는 한 번도 부모님 집을 떠나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 집에서 살 때, 라면 끓이는 게 다인, 내 손으로 청소나 요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당시 아빠는 남자였으면 군대라도 가는데, 그러지 못하니, 혼자 어디 한번 고생해서 일 년 살아보고 와라 이런 소리를 하셨다. 그 말이 무섭게도 나는 뉴질랜드에 도착한 첫날부터 적응하지 못하였다. 유학원에서 찾아준 방은 사진으로 봤던 거보다 작았다. 총 몇 명이 살았던 집이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지냈던 방에는 다른 한 명이 더 지냈는데, 그 방에 싱글 침대 두 개가 들어가면 꽉 차는 그런 곳이었다. 정말 모르는 타인과 같이 방을 쓰려니, 최소한의 나만의 방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나는 도착 한 첫날부터 잠도 안 자고 새로운 방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라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스타일이다.


모든 게 낯설고, 외로워서 부모님께 전화해서 엉엉 울었던 기억도 난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더 누리자고 낯선 여기를 혼자 왔나 이런 생각을 했다. 


한 달쯤 후에, 나는 새로운 방을 구했다. 매트리스만 있는 작은 방이었다. 플렛메이트 두 분을 만나서,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나의 생일에는 직접 만든 초콜릿 케이크를 선물로 주셨었다. 직접 구워주신 따끈따끈한 스콘과 같이 먹던 우유 섞은 홍차는 지금도 기억에 오래오래 남아, 나는 아직도 홍차를 마시면 우유를 넣어마신다. 


뉴질랜드에서 마지막으로 살던 곳은 여덟 명 또래의 여러 친구들이랑 방이 6개, 화장실은 변기칸, 샤워칸 따로 나누어진 집에 살았다. 터키 레스토랑 뒤편의 집이었는데, 그라피티가 가득한 좁은 골목길에 입구가 있는 집이었다. 그 당시 한인들 사이에서는 좀 위험하다는 거리에 있던 집이어서 그런가 집세는 쌌다. 그때는 주 단위로 집세를 냈어야 했는데, 뉴질랜드 돈으로 160을 냈다. 대학을 다니거나, 워킹홀리데이를 하거나 하는 친구들이었다. 집 지붕에 올라간 적도 있고, 저녁에 다 같이 밥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홈파티를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집 근처 바에서 같이 사는 한 친구랑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건장한 남성 두 분이서 우리의 핸드폰을 뺏으려 했다. 다행히 내 친구도 키가 크고 건장했고, 내가 문 앞에 있었고 친구가 뒤에 서서 이 두 남자와 대치중이었다. 내가 빨리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들어가서 문을 잠 구웠다. 정말로 지금 생각해도 십 년 감수한 일이다. 이 기억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글을 쓰다 보니, 이제야 한국이었으면 경찰을 불렀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 당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 당시 밤에 공원에 혼자 다니면 핸드폰을 가져가는 일이 있다고 들었어서, 흔한 일로 생각하고 넘겼나 보다. 하긴, 경찰이 왔어도, 주변에 CCTV도 없고, 블랙박스도 없는데, 해줄 수 있는 게 늘 하는 순찰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라면 끓이는 거 빼고는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뉴질랜드에 갔다. 처음에 파스타를 만들어 먹을 때는 면만 익히고, 슈퍼마켓에서 소스를 사서 그냥 위에 부어서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정도였다. 라면을 자주 먹었는데, 일 년을 그렇게 먹다 보니 장이 나빠져서 한동안 고생을 꽤 많이 했었다.  부모님 집에서 살 때는 집밥을 잘 안 먹었는데, 이제는 부모님 집에 가면 집밥, 한식만 먹게 되었다. 이제는 세끼 라면에서 벗어났지만, 바른 식습관을 가지려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서 겁 없고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나의 외로움 와 어떻게 친해질지 몰랐다. 현지인 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겹쳐서, 나는 스스럼없이 생판 모르는 남들과 안면을 잘 텄다. 


오랜 과거의 일이라 전후는 기억이 이제 안 나지만, 한 번은 공원에서 만난 또래의 현지인 여자애랑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하다가 점심을 해준다 해서, 따라가서 파스타를 얻어먹은 적도 있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였고, 한국에 대해 좀 아는 좋은 친구였다.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지만, 그때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같이 교회에 갔었다. 교회 하면 피아노와 조용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그 교회는 피아노 대신에 밴드 음악이 있었고 젊은 사람들이 서서 노래를 같이 부르는 게 콘서트 같았다. 나는 교회를 통해서 다른 또래의 현지인 사람들과 여러 나라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었다. 그때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서 밥을 얻어먹는 게 이게 위험한 행동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혹시나 나쁜 사람이었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서, 아 운이 좋았구나를 깨달았다. 지금 길에서 처음 만난 낯선 이 가 누가 밥 해줄게 집에 가자 하면, 그때처럼 선뜻 따라나서지는 못할 것이다(이제는 걱정 많고 조심성 많은 어른이 되었다.).



한 번은 오래된 자동차로 여행을 했다. 자동차는 80년대에 만들어진 그냥 봉고차였는데, 운전하면서 가다가 새워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하면서 남쪽까지 여행을 했다. 나는 다니는 학교 스케줄 때문에 펭귄이 있다는 지역까지는 못 가고, 크라이스처치까지 친구와 같이 여행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내가 뉴질랜드에 일 년보다는 좀 더 살 줄 앗았고, 그래서 나중에 펭귄 보러 가면 되겠지 했다가 결국에는 못 봤다.


차 타고 여행 중에 앞에 보이는 경치, 지나고 보니 다시 못할 좋은 경험 (이제는 봉고차에서 자면서 여행하면 병원신세)


여행 중에, 한 번은 시내의 한 야회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하고 잠을 잠을 청했다. 차가 덜컹거려서 우리는 산짐승이 차 근처에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어느 술 취한 아저씨가 추워서 차 안에서 자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쁜 아저씨는 아니라서 내쫓고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다른 한 번은, 남쪽에 눈이 좀 쌓여있는 동네를 지나는데, 현지인 아저씨가 집에 빈 방이 있다고 재워줄까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뭘 믿고 남에 집에 덥석 들어갔는지 모르는 우리는 그 아저씨의 호의 덕에 하룻밤을 따끈하게 방에서 잤다.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하다 이제는 안 한 지 오래됐지만, 생판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방을 내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앞서서 집이 그리워서 엉엉 울었다고 했지만, 지금 생각했을 때는 혼자 뚝 아무도 모르는 곳에 떨어진 경험이 진정으로 어른이 되는 독립을 하는 중요한 과정의 시작점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항상 내게 나는 평생 부모님한테는 애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그런 부모님과 같이 살면, 너무나 잘 챙겨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부모님이 생각하는 틀 외의 부분에서 모험을 하려면 항상 다툼을 감수해야 했다.


뉴질랜드에 갔을 때, 아직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은 못했지만, 정서적 독립과 스스로의 나를 찾는 길을 시작했다. 지금은 완전한 독립은 했지만,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은 계속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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