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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미 May 23. 2019

어느 날의 일기 2

10월 2일, 2016

전역을 하고서는 글을 쓰고 싶었다.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2년의 시간 동안 나를 구원한 것은 그저 적혀있는 말들이었다. 백 여 통의 편지들, 백 여 권의 책들, 수 백 여 장의 메모와 일기들. 음성은 없지만 살아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이제 자가호흡이 안 된다던 할머니의 소식을 듣던 장마에 갓 자대배치를 받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불 꺼진 독서실에서 소설을 붙잡고 있는 일일 뿐이었다.


그러고 두 달 뒤에 세월호가 침몰했다. 어느 술집에서 삼 백 여명의 사람들이 잠겨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어느 때처럼 구조될 것이라는 말을 믿었다. 그렇다면 뭔가 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니까. 사람들이 죽어갔다. 믿었던 것들이 모두 힘을 잃었다. 어떤 윤리적인 문장도 이 죽음들에 의미를 덧붙일 수 있을리 없었다. 글은 또 쉽게 할 일을 잃었다. 할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사람들의 옆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때 거리에 그렇게 쉽게 서있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후로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은 죽음들, 많은 삶들과 마주해야 했다. 사람들에게 이 일이 맞다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말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 때로는 죽은 이들의 말을 빌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부끄러워서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말을 멈추고 싶었다. 불행을 얘기하는 것이 무서웠다. 살아있다는 것으로는 왜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건지 그때마다 무력함을 책망하며 살아온 시간들을 원망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말의 책임을 견딜만큼 다시 무언가 하는 것뿐이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나는 머뭇거린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죽어가는 사람의 충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지금도 참 무섭다. 하지만 지나온 몇 년 동안 내가 알게된 건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일, 그 사람이 바라던 것을 자기 입으로 되뇌이는 것이 죽어간 이를 말하는 사람에게 견뎌야 할 책임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마주해야 한다면 결국 이 무서운 일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 나의 두려움은 이 죽음보다 가치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타자의 세계에 눈을 돌리는 일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길에 자신을 내던져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다리마저 끊겨있는 끝없이 어두운 벼랑길을 건너기 위해 끊임없이 나이기를 외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것들을 버리고, 더 많은 것들을 비우지 않으면 무언가 들일 공간을 만들 수 없다. 그저 거기 메워진 것이 언젠가 나를 가늠하는 좌표가 될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게 나이겠거니 생각하는 것이 외롭지 않으면 되었다.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동료이든, 동지이든, 혹은 세계이든 그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부정확한 믿음에 근거하면서.


이 앞에 얼마나 많은 삶이, 얼마나 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하나의 순간을 살아내고 나면 비워지는 마음에 댐이 터진 것 같은 물살이 헤집고 들어와 메운다. 그게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이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다시 죽은 사람의 말을 빌리지 않고 살아가자고 다짐하고, 내일은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함께 살아남자고 말할 것이다. 부정하게도 나는 그게 무언가 나아지는 과정 중에 하나라 믿고 있는 것 같다.


이게 과학이라고는 말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게 그저 사는 거 아니냐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간극을 메우는 건 다시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일 뿐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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