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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Oct 18. 2019

워라밸의 기준점은 어디?

시작점이 어딘지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시각

내가 처음 미국 소재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기대했던 대로 워라밸 (work-life balance)이 좋다는 것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팀별로 차이는 있어도 보통 5시면 자리를 뜨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금요일에는 회사를 안 나오는 사람이 많아 사무실이 텅 비는 것이 일상이고, 동료 여사원이 출산 시에 3개월의 유급 휴가를 (남편의 경우 2주였는데 이것도 최근 2개월로 늘어났다)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쓰는 것을 보면서 이쪽으로 온 것이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또 다른 팀 동료 하나가 출산 휴가를 떠나기 전에 팀 차원에서 베이비 샤워를 해 준 날이 있었는데 (팀에서 눈치를 주기는커녕 파티를 열면서 보내주니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그녀가 약간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3개월 휴가라니, 미국은 이런 규정이 너무 빡빡해서 참 별로야. 유럽에 있었으면 xx개월은 받았을 텐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아 역시 유럽이 복지와 노동권은 최강이구나. 미국은 딱 중간이고 한국은 정말 노동자에게는 헬이었군.


이런 건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행동을 차분히 관찰해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국제기구에 자리 잡았다가 한국 조직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업무 문화도 더 여유롭고 연봉도 더 주고 (동일업계 기준) 애들 교육에도 더 좋다고 생각되며 심지어 공기도 더 맑으니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돌아갈 이유가 없다. 한국뿐 아니라 대체로 개도국에서 온 동료들은 한번 자리 잡은 후에는 조직을 완전히 떠나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하지만 유럽 출신들은 조직을 떠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나의 덴마크 동료도 얼마 전에 우리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덴마크로 돌아갔다. 그 친구는 날씨가 좋은 미국에 (여기는 서부도 아니고 동부지만, 이 정도만 해도 덴마크의 우울한 날씨보다 훨씬 좋다고 한다) 남고 싶다고 했지만 와이프가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했다. 와이프의 이곳 생활 불만 중 하나는 남편이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 친구 6시면 집에 따박 따박 들어갈 텐데 뭐가 문제인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덴마크에서는 3-4시면 집에 들어오는 게 보통인데 여기서는 집에 6시는 되어야 오니 너무 힘들어…”라고 말했다. 언론에서 유럽 복지국가가 이렇다더라 하고 듣고 흘리는 것과 내 주변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진심으로 툭 내뱉는 것을 듣는 것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스위스에서 온 또 다른 친구 하나도 자신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미련 없이 스위스로 돌아갔다. 스위스는 미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도 높고 워낙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사실 그에게는 이곳 생활이 연봉 면에서나 생활 면에서나 좋을 것이 없었을 수도 있다. 프랑스 동료 하나도 최근 프랑스에서 좋은 자리를 잡았다며 급하게 퇴사 통보를 한 후 룰루랄라 이직을 준비 중이다. 프랑스는 북유럽이나 스위스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었는데 웬걸,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들 대부분이 연봉만 고려하면 미국에 남는 것이 아마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스위스 제외?) 하지만 자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생활, 즉 Work와 Life 중 Life에서 자국이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이렇게 내가 어디 출신이냐에 따라 일과 삶의 균형을 보는 기준점이 다르고, 따라서 적정하다고 느껴지는 워라밸 수준도 많이 다르다. 한국의 워라밸 수준은 최근에 빠르게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객관적으로 좋다고 느낄 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미국의 민간기업도 워라밸 수준이 한국보다야 좋겠지만 휴가나 업무 강도 면에서 그리 여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현재 우리 회사는 미국 공공기관과 비슷한 수준의 워라밸 수준을 유지하는 것 같은데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온 나에게는 지금 정도가 딱 좋다고 느껴진다. 북서유럽 수준의 워라밸이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걸 원한다고 하면 왠지 도둑놈 심보인 것 같고, 욕심을 과하게 부리는 것 같으며 어디서 오는지 모를 죄책감이 들 것 같다. 나는 근로자이지 사장이 아님에도 왠지 사장님 마인드도 발동한다. ‘3-4시에 퇴근한다면 점심시간 빼면 몇 시간 되지도 않는데, 대체 일은 언제 한다는 거야? 완전 배가 불렀구먼.’ 


그러나 북서유럽 출신들이 보기에는 저것이 norm이기 때문에 미국 공공기관 수준의 워라밸은 충분치 않다고 느껴지거나 최소한 불합리한 점이 있는 것이다. 사실 국가에서 2년까지의 유급 출산 휴가를 보장하는 환경에서 온 사람에게 이곳의 워라밸 수준이 성이 찰 리 없다. 미국의 지나친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 회사처럼 인력 구성이 다양해서 유럽 스탠더드를 공유하지 않는 빡센 개도국 출신 상사가 언제든 ‘물을 흐리는' 일이 가능한 이곳의 상황은 더 탐탁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의 워라밸이 가장 적절할까. 이런 것에 대한 정답이 있을 리가 없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개인의 인식과 가치관, 출신 지역의 문화 그리고 현재 위치에 따라 나와 가장 잘 맞는 형태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워라밸에 대한 내 인식과 가치관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언젠가, 직장인의 첫 2년 동안의 사회 경험이 향후 직장생활의 기준을 결정하게 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 경험한 곳의 스타일이 무의식 중에 내 기준점이 되어 버리는 "앵커링' 효과다. 읽을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요즘 내 모습을 보면 정말 맞는 것도 같다. 나는 지금 직장의 워라밸이 좋고 그 기준에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6시 이전에는 엉덩이를 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니저가 퇴근하기 이전에는 왠지 사무실을 비우는 것이 영 꺼림칙해서 퇴근 전에 항상 슬쩍 지나가면서 매니저 사무실이 비어있는지 꼭 확인한다. 이 모든 것이 한국에서 사회생활하면서 내 몸에 각인된 패턴들이다. 그렇게 매니저도 퇴근했고, 동료들도 거진 다 퇴근한 무렵인 6시쯤 퇴근하는 나는 남들보다 일도 더 하고 늦게 귀가하면서도 사실은 마음도 편하고 아직 해가 아직 지기 전이라는 사실에 무척 만족스러워하며 귀가한다. 한국에서 약간 뺀질거리는 스타일이었던 내가 이 정도니 다른 한국분들은 더 하다. 스트레스받아 궁시렁대면서도 기어이 야근을 하는 분들도 많다. 내가 보기엔 특정 상황에서 그저 몸에 익은 패턴이 나오는 것 같다. 


아무튼 앵커링 때문에 아직도 눈치 보며 퇴근하고, 가끔 그룹 총재가 선심 쓰듯 조기 퇴근 권고 메일을 뿌려도 굳이 한두 시간 더 엉덩이 붙였다가 일어나는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앵커링 덕분에 나는 이 정도 워라밸 수준으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엔 사실 지금 직장에서도 바쁜 시즌이어서 다들 원성이 높고 나도 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지만 그나마 7시 정도에 퇴근이다. 사회생활 초반에 일찍 퇴근하면 7시, 걸핏하면 9-10시, 바쁜 프로젝트 기간에는 새벽에 퇴근하거나 밤을 새우고 하던 일들을 생각하면 참 감사할 따름이다. 이쯤 되면 사회 초년생 시절에 꽤나 불합리하고 빡센 사회생활 경험을 내 뇌에 각인시켜준 내 첫 직장 그리고 당시 한국의 직장 문화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직장문화가 싫었던 나는 자연스레 더 나은 것을 찾아 이끌려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면 그런 직장문화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덕분에 지금 나는 같은 환경에서도 유럽 출신들보다 좀 더 만족스럽고 긍정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하며 회사를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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