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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석사 Nov 17. 2020

그렇게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중간고사가 끝났다. 


 대학 졸업 후 10년. 간간히 했던 자격증 공부를 제외하고 내 인생에 더 이상 시험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시험지의 단어마다 밑줄과 동그라미를 잔뜩 그리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서른을 맞이하고 몇 해가 더 지난 어느 날, 나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소년이 잘못을 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생이 된다는 우스개 소리에 남 일인 양 깔깔 웃었던 게 후회되었다. 그 당사자가 내가 되다니. 



 사실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아니었다.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던 때, 막연히 대학원에 진학하는 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연구가 명확하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던 동기들을 따라 진로를 생각했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기에 졸업 후에는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두 번째 대학원 진학을 고민했던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금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침 함께 일했던 교수님도 진학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셨기에 거의 입학할 뻔했다. 하지만 결혼생활과 진학의 갈림길에서 결국 결혼생활을 선택했고 대학원을 가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그 학문에 대한 간절함이 부족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공부를 하게 될 기회는 있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진학에 대한 결정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내 꿈에 가장 근접한 학문을 실제로 다루고 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직장과 육아 사이를 전전하며 막연한 목표조차 없던 그 시기에 무언가 불을 지피는 기분이었다. 


 신기했다. 관심이 생기자마자 무엇인가에 홀린 듯 학회의 학술제를 찾아다니고 기사를 찾아보고 졸업을 하신 분들께 연락을 취해 정보를 얻었다. 어느 정도 정보를 모았으니 이제 도전을 하기 위해선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다. 



 일단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부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자산을 공유한다. 그중 대학원 학비라는 적지 않은 돈이 들고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가 외벌이가 되면서 가계 수입이 절반으로 준다는 뜻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직장생활의 경우 (직장마다 다르겠지만) 퇴근 후에는 ON/OFF가 가능하여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지만 학업은 다르다. 수업은 별개고 매주 쏟아지는 과제와 따라가기 위한 공부를 위한 시간 투자가 필수다. 그만큼 육아 참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고 그 희생은 오롯이 상대방이 짊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여보, 나 대학원에 지원해보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완벽하게 남편만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안이었다. 남편이 투자자고 내가 투자처라면 나는 이만큼의 투자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싶었다.


 생각보다 남편은 흔쾌히 허락했다. 심지어 어떤 것을 배우려고 하는지 취득한 이후엔 어떻게 할 계획인지조차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라면 기회가 있을 때 하라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 입학원서의 가족 관계란에 기존에 늘 적어왔던 아버지, 어머니의 성함이 아닌 남편과 네 살 된 딸의 이름을 적었다. 


 그렇게 나는 공부하는 엄마로서의 한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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