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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r 13. 2019

오키나와에서 아이와 살아보기 #3

3. 아이의 시간을 따라

3. 아이의 시간을 따라



"내가 다시 애랑 여행 가면 사람이 아니다!"


이전에도 몇 번의 여행을 아이와 함께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정해진 대사처럼 저 말을 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 우리는 모든 걸 잊고 또다시 아이와의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녀와한 참 후에 사진으로 보면 모두 좋은 추억들이지만 실제의 여행은 칭얼대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가며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난한 고생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매번 여행 후엔 꼭 심한 몸살감기를 앓곤 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우리는 차 안에서 쪽잠을 재워가며 아이는 기억도 못할 버킷리스트를 채우느라 여행인지 고행인지 모를 일은 이제 그만하자고 다짐했다. 철저히 아이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자고, 자신도 모르게 욕심을 낼 땐 서로 말려주기를 약속하며 떠났다.




아이에게 매 순간 새로운 자극이 아니라,

새로운 곳에서의 따뜻한 일상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었다. 매일 보는 풍경인데도 아이는 똑같이 신나 했다. 오히려 익숙해질수록 마음 놓고 신나 하는 듯했다. 항상 신선한 자극을 줘야 지루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우리만의 강박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어쩌면 매일 마음 놓고 신나 할 공간과 믿을만한 사람이면 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집 앞의 작은 상점 앞을 지날 때면 자기 생각에 그곳이 멋져 보였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뛰어가 매번 같은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집 근처 카페에서 노닥노닥, 골목길 탐험, 이름 모를 새 하염없이 바라보기, 손바닥만 한 마당의 나무들 만져보기를 하다가 아이가 긴 하품을 하면 언제든 다시 집에 들어와 모두가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아이의 시간을 따르려다 보니 저녁밥을 밖에서 사 먹기란 쉽지 않았다. 집에서 요리해 먹고 씻겨서 재우는 편이 아이의 사이클에 좀 더 맞았기 때문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이면 우리는 늘 주섬주섬 모자를 눌러쓰고 마트로 향했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식재료 구경하는 재미는 그동안 잘 몰랐던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이곳의 과일과 채소들, 수족관에서나 봤을 법한 새파란 열대어가 고등어나 삼치처럼 마트에 진열된 것을 보고 아이보다 우리가 더 놀라기도 했다. 놀라움은 달걀 코너에서도 계속됐다. 달걀이 사이즈별로 판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왕 사는 거 큰 사이즈를 샀더니, 달걀 하나만으로 밥그릇에 가득 차는 양에 이건 시급히 한국에 도입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두부, 어묵, 초밥, 회, 라면에 이르기까지 다행히 우리에게 익숙한 식재료들이 많아서 그날그날 해 먹는 요리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셀 수 없이 많은 맥주 중, 그날 마실 한두 캔의 맥주를 사는 것도 우리 부부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늦은 오후, 모두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비몽사몽 속에, 할 수 있는 요리의 레퍼토리가 끝나가고 있음을 인지할 무렵.

평소 어묵탕을 좋아하는 남편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일본에서 어묵탕 한번 끓여먹어 볼까?”라고 아이디어를 던졌고, 나는 그걸 덥석 물었다.

우리는 또다시 마트로 향했다. 매번 그냥 지나치던 어묵 코너에 들어선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곳엔 매일 가면서도 몰랐던 엄청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모양도 재료도 가지각색인 어묵들 앞에 우리는 말을 잃었다. 어묵의 세계 속에서 탐험하다가 심봤다! 를 외치듯, 가끔씩 각자의 위치에서 “이거 봐!” “이거 봐 봐!”로 서로의 존재를 알리며 한참을 어묵 쇼핑에 열을 올렸다. 어묵의 종류, 속을 알 수 없는 유부주머니들, 모양도 가지각색인 우무들 속에서 겨우겨우 몇 개를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종류는 다양하고, 먹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있는 아쉬움 속에서 심도 깊게 골라온 어묵들로 어묵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생각보다 어묵은 크게 부풀어 올랐고, 아직 반도 안 넣었는데 이미 들어간 어묵들이 초단위로 존재감을 뽐내며 냄비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결국 같은 냄비에 세번을 나누어 끓여 먹고난 우리 부부는 나란히 서서 소화제를 털어 넣었다.

절대 무리하지 않기로 한 여행의 계획이 아쉽게도 우리의 위장만은 비켜갔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꾸역꾸역 해치우던 일상을 이곳에선 아이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뒤따랐다.

매번 새로운 풍경 앞에 서지 않아도, 엄청난 경험을 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무언가를 계속 사지 않아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여행이 된 느낌이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씻고, 다 같이 깔깔 웃고, 긴 하품을 하는 순간의 짧은 여행들이 모여서,

우리만의 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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