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가 정착하는 법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전날 장 봐온 것들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 먹었다.
그릇장을 열어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그릇들을 신중하게 골라 쉽게 만든 스크램블드 에그와 과일들을 담았다. 별로 한 것도 없이 꽤 괜찮은 식탁이 차려졌다.
낯선 곳에서의 삶이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다.
저마다 정착을 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우리 가족이 이 곳에 정착하는 첫 번째 방법은 집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카페를 찾는 것이었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편한 신발에 편한 옷을 입고, 아이와 함께 출근 도장을 찍을 우리만의 아지트를 찾아 집을 나섰다.
지난밤. 집을 찾아 헤매던 곳이 맞을까 싶게 햇빛이 가득 찬 세소코 섬의 작은 시골길은 한적하고 따스했다.
집들을 지날 때마다 기르는 가축들이 메에에, 야옹야옹, 멍멍, 저마다의 울음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처음 듣는 실제의 동물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신나게 대답했다.
이런 곳에도 카페가 있을까 싶은 한적한 시골길을 조금 걷다 보니 갈림길 직전에 작은 글씨가 보였다.
나무에 손으로 정성스레 써놓은 글자에 이미 우리는 마음을 홀딱 뺏겨버렸다.
화살표를 따라 조금 걸으니 재미있는 표지판이 한 번 더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찾던 곳이라는 확신을 서로의 표정에서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래된 담벼락들 사이로 세월을 알 수 없는 낡은 기와집 앞, 작은 프랑스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담 안쪽으로 들어서자 제멋대로 엉킨 담쟁이넝쿨, 내가 들어가기에도 비좁은 문, 긴 막대로 지지해 놓은 연약한 창문들,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거대한 나무들이 구름인 듯 나뭇잎은 듯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거기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무로 만들어진 집, 모두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 곳곳의 소품들이 어느 하나 멋지고 빛나는 것이 없었다. 의자로, 어느 집 창틀로, 누군가의 식탁으로 한 평생 쓰이고, 남은 여생을 소일거리 하는 늙은 나무들의 모임처럼. 모든 것이 삐걱거리고 뒤뚱거렸다.
이런 카페에서는 뭘 먹어야 할까 고민하며 낡고 좁은 문을 넘자 마카롱과 프랑스식 커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련된 사치품 같은 마카롱과 프랑스식 커피가 이 공간과 어울리는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곳과 마카롱이라니! 인간의 상상력은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이곳의 이질적인 조화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까지 존재 자체도 생소했던 작은 섬에 이렇게 멋진 우리만의 아지트가 생기다니
손에 예쁜 나비를 쥔 것처럼, 너무 소중해서 펼쳐 보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꽉 쥐지도 못하겠는 마음이었다.
카페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창가 쪽에 오래된 단골 포스를 풍기는 할아버지 한 분만이 작업복과 장화를 신고 커피와 마카롱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부부와 아이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나는 손자를 맞듯이 연신 "카와이네~ 카와이~" 라며 반겨 주었다.
할아버지는 뭐 줄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사탕 두 개를 꺼내 아이 손에 쥐어 주었다.
아직 사탕을 먹지는 못하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아이도 오래도록 만지작만지작 사탕을 쥐고 놀았다.
우리는 프랑스식 라테인 카페오레와 천일염 마카롱, 미깡(귤) 마카롱을 주문했다. 검은 금붕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어항이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먹어본 적 없는 생소한 재료의 마카롱 맛을 상상하며 본격적으로 카페에 녹아들 준비를 했다.
어디선가 고양이 두 마리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왔다. 카페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인 듯했다.
고양이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익숙한지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올라 할아버지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가 이내 새근새근 잠들어버렸다. 한동안 고양이를 쓰다듬던 할아버지는 나갈 채비를 하며 링고까페의 여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고양이랑 아이, 모두 귀엽네!"
"정말 그러네요."
둘은 하하 웃고,
"또 만나!"
"또 만나요!"
익숙한 헤어짐을 했다.
매일 아침 입에 맞는 커피 한잔과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일터로 나서는 할아버지의 일상.
그 일상 속에 우리도 함께 인 것 같아 행복해졌다.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잠을 깨기 위해 아무 커피나 몸에 들이붓고, 때우듯 사는 나의 일상이 겹치듯 보였다.
할아버지의 조금 수고롭더라도 작은 취향을 지키는 일상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생각했다.
돌아오는 날까지 매일 아침 링고 카페에 들러 고양이들과 천천히 친해졌다. 조금 무뚝뚝하지만 그마저도 배려로 느껴지던 여주인, 언제나 묵묵히 마카롱과 케이크만을 만들던 프랑스인 빠티쉐와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각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최선을 다해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