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Feb 09. 2019

오키나와에서  아이와 살아보기 #1

1. 세소코 섬의 작은 집



긴 야근의 터널을 홀로 빠져나왔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을 견딜 수 없어 이직을 선택했다.

그만 둘 회사에서는 하루라도 더 일해달라고, 옮길 회사에서는 하루라도 더 빨리 나와달라고 난리였다.

설득에 설득들을 했지만 완강히 버텨 한 달의 시간을 얻어냈다.


돌이켜보니 잠깐이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곧 고단한 회사인의 삶이 다시 시작되겠지만 그만둔 순간, 무거웠던 어깨의 짐들이 툭 떨어진 듯 가벼웠다. 그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진정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휴가를 오면서 미뤄둔 업무를 생각할 필요도, 휴가 중 틈틈이 날아드는 메일과 카톡을 확인할 필요도 없는 십여 년 만의 진공상태.


한 달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아이와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쫓기듯 추억을 빽빽이 수집하는 '여행'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또 걸을 것처럼 천천히 '살아보고 싶었다'


아이와 함께 떠날 여행이었기에 비행시간이 너무 길지 않은 하지만 충분히 이국적인 기후를 만날 수 있는 곳, 너무 화려하지 않은 곳이었으면 했다.


우리의 선택은 오키나와였다.


오키나와에서 잠깐이지만 천천히 살아본 기억들을 쓰고, 그려보려 한다.








1. 세소코 섬의 작은 집


진짜 살아보듯 여행하기 위해

오키나와 세소코 섬의 작은 집을 빌렸다.



여행 첫날, 밤이 늦어서야 오키나와에서도 다리를 한번 건너 세소코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날은 생각보다 빨리 어두워졌고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에서 한참을 들어간 집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은 도착했다고 했지만 있어야 할 집은 없었다. 갔던 길을 몇 번 거슬러 올라 좁은 골목길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는 작은 집 'SESOCO HOUSE'에 도착했다.

집주인은 열쇠를 집 앞 우편함에 넣어두겠다고 했고 비밀번호를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무사히 도착한 것에 안도하며 이메일을 여는데,

아뿔싸! 준비해 간 와이파이, LTE 모두 먹통이었다. 인터넷 강국 국민답게 인터넷만 믿고 허술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어렵게 도착한 집 앞에서 차를 돌려 인터넷이 터지는 큰길까지 나와 비밀번호를 알아내고는 다시 돌아갔다.


어렵게 만난 세소코의 작은 집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세소코 하우스의 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한 집에서 알싸한 나무 냄새가 먼저 콧속을 밀치고 들어왔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삐걱삐걱 오래도록 박자를 맞춰온 나무 조각들이 인사를 했다.

멀리 떠나와 처음 발을 디딘 집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옛날 외갓집의 느낌이었다. 오래된 나무의 냄새, 삐걱삐걱 소리. 반질반질 시간이 닦아 놓은 반짝임. 낯선 집이 익숙한 추억을 불러냈다.

아이와 호텔이 아닌 곳에서 묵어보는 첫 집. 괜찮을까 반신반의했지만 집에 들어서자마자 떠나온 진짜 우리 집보다 더 푸근함을 느꼈다.



"언젠가 살아보고 싶었던 집이야."



남편이 말했다.

지금 살고 있는 (한국) 집을 계약할 때의 기억이 문득 스쳤다.

교통, 층간소음, 기반시설 여러 가지를 두고 계산기를 수도 없이 두들기고, 재고, 밀당해 고르던 고단한 기억.

세소코 하우스에 도착한 순간, 앞으로 살 집을 고를 복잡한 함수가 탁 풀렸다. 내가 언젠가 살고 싶은 집은 사실 이런 소박 함을 가진 집이구나. 생각하면 긴장이 풀리고, 한없이 푸근한 감정이 드는 그런 집.



"탁!"



어두운 집의 불을 켜자 깜짝 놀란 도마뱀 두 마리가 천장에서 어리둥절해하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어 시간 비행기를 탔을 뿐인데 열대지방에 도착하다니.

벌레가 제일 무서운 도시 남녀가 낯선 열대지방의 작은 섬에서 도마뱀을 마주 했을 때의 공포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여기서 용기 낼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태연한 척 연기했다.


"우아~ 도마뱀이네? 도마뱀은 귀엽지!"


억지로 짜낸 웃음을 지으며 그 집에 있는 가장 큰 종이를 집어 들어 도마뱀을 유인했다.

한 마리는 천천히 도망가고 다른 한 마리는 옛다 잡혀 주었다. 종이 끝에 달랑달랑 도마뱀을 매달고 집 밖에 나가 놓아주고는 냅다 뛰어 들어왔다. (아직도 아이는 책에서 도마뱀을 보면 종이를 집어 들고 아빠가 도마뱀을 잡던 상황을 따라 해 배꼽 쥐게 한다.)



에너자이저의 끝없는 질주


우리 세 사람은 각자 천천히 집안 곳곳을 탐색했다. 집의 구조는 단순했다. 침대방과 다다미방, 주방, 거실이 구분은 되었지만 미닫이 문을 다 열어놓으면 크게 한 공간이 되었다. 아이는 둥글게 둥글게 계속 집 전체를 뛰어다녔다. 아이가 마구 뛰어도 누구도 불행해지지 않는, 한 밤의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한 작은 집과 우리 가족은 금세 사랑에 빠졌다.



이런 집이라면 제대로 살아보겠어!



여행자의 신분증 같은 커다란 캐리어에서 모조리 짐을 꺼내고는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세소코 하우스의 오래된 옷장에 우리의 옷을 차곡차곡 개어 넣었다. 곳곳의 서랍속엔 우리의 물건들을 씨앗을 심듯 하나씩 심어두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 집에서 살아가기 위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