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아 Oct 15. 2020

글쓰기 모임 중입니다




  가을에 떠나려고 예매해두었던 런던행 비행기가 결항됐다. 직장인이   버틸 명목을 뺏어간  망할 코로나. 10 1일에는 한국을 뜨자고 했던 회사 동기들과의 계획은 7 어느 , 통장 계좌로 100 원이 환불되면서 끝났다. 평소 같으면 공돈처럼 여겨질 액수가 허무했다. 착잡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환불액은  써야만 했다. 동생과의 짧은 호캉스로 절반을 소진하고 절반이 남았다. 어디에 써도  썼다고 날리 없는 소문에 집착하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던 와중, 온라인에서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는 분이 소식을 전해주신 거다. 은유 작가님의 글쓰기 모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그렇게 바라던 ' 썼다고 소문내야 마땅한 소비'였다.

 은유 작가님은   되는 나의 '최애 작가 리스트' 속해 있다.  처음 그를 알게   저서인 '쓰기의 말들'. 글쓰기에 대한 영감으로 가득해, 쓰지 않고는 도저히   없게 만드는 책이었다.  후로 작가님의 책을 하나씩 사고  읽었다. 날카롭지만  서있지 않은 문장이 좋았다. 우리가 쉬이 외면하는 사회의 모습을 예리한 문장으로 고발하면서도 함부로 타인을 상처 내지 않는 문장들에 절로 동경심이 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단상들을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보물을 캐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을 적마다 밑줄 긋느라 바빴던 나이기에, 그의 피드백을 직접 받을  있는 글쓰기 모임이 설레지 않을  없었다.

 게다가  모임은 30명의 서로 다른 학인들의 글을 읽고 합평 (함께 리뷰하기)   있다. 모임에서 오는 모든 감각이 새롭기만 했다. 30대이고, 싱글이고, 광고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의 세계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그들을 통해서 깨닫는 중이다. 만나는 사람들의 결이 비슷하면  결이 마치 세상의 전부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많으면 마치 그게 가장 나은 선택지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세계는  팔을 안아 만든 ,   정도였다.

 결혼과 아이가 끼어들지 않은  세상, 노동자의 권리보단 소비자의 취향이  중요한  업무, 사는 땅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비건이 아닌 업계 트렌드로 익히는 모니터  외침에 불과했던 나의 세상은 글쓰기 모임으로 인해 조금씩 깨지고 있다.

  확장은  시야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일어나는 중이다. 가끔씩 빼먹긴 해도 일주일에   정도 브런치에 글을 공유하고 있지만  글이 공적 글쓰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가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가장  이유였다. 나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편견 없이 글을 처음 읽게  경우 어느 부분에서 막혔고, 어느 부분에서 불편했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가님은 물론 반장님과 학인들이  글을 읽은 소감을 입을 열어 얘기해주는 경험은 놀랍기만 하다. 무안하고 쑥스럽기만   알았던 처음의 예상과 달리 합평당하는 내내 즐거웠다. 몰랐던 사실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말버릇이 문장에 투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있었다는  누군가가 지적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필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문장이 읽힐  있다는 것은   가장  아픈 깨달음이었다.  글이 누군가를 다치게하거나 불편하게   있단  처음 알았다. 지난 주차, 나는 가족에 관한 글을 쓰고 합평을 받았다. 결혼  엄마에게 생긴 불행에 대해 나는 아래처럼 표현했었다.




[ 스무 살의 새내기 정미 씨가 결혼 후 정미 씨가 겪을 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눈치챘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시간을 돌리는 방법이 있어서 스무 살의 그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 저 남자와 헤어져! 저 인간은 사기꾼이야! 나중엔 아프기까지 한다고! 비록 그로 인해 내가 태어날 수 없다한들 그 편이 엄마의 인생을 위해서 옳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

 


 이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 불편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옳다, 그르다'의 판단은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 자칫 이 문장은 원치 않게 얻어진 장애에 대한 '그르다'라는 평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타인의 입장에서 글을 마주해야 하며 이런 문장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그런 피드백을 들었다.

 물론 내 의도는 아빠의 장애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다. 간염을 앓고 있었던 나와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집의 경제 상황, 고부 갈등을 짊어지고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엄마 삶 전반에 대한 안타까움은 십대 내내 들었던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나에겐 엄마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복합적인 감정들이 있었고 이를 마주하고 글로 풀어내기 어려워 '그게 엄마 인생을 위해 옳을지 모르니까'라는 문장으로 얼버무렸던 것이다.

  칼은 날카로울수록 사람을 해치지만 문장은 반대라는 걸 알았다. 문장은 뭉툭하고 모호하고 애매할수록 오히려 누군가를 공격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 번에 읽히지 않고 여러 번 읽어야 이해되는 문장일수록 해석의 여지는 넓어지고 동시에 그 문장이 공격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진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로는 덮을 수 없다. 비록 글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글을 쓰고 있기에, 내 창작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사적 글쓰기와 공적 글쓰기의 차이라는 걸, 타인에게 읽힘으로써 비로소 깨달았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 합평이 없었다면 내게서 얼마나 더 많은 모호한 문장들이 탄생됐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막 4주 차의 모임이 지났다. 여전히 글쓰기는 어렵고 과제를 하기 위해 문서의 흰 바탕을 마주할 때면 망망한 바다 위에 떠있는 것 같다. 나아갈 방향도 길도 알 수 없는 바다 위. 그럼에도 노를 저어 보는 것은 언젠가는 나의 글도 '날카롭지만 날 서 있지 않은' 지경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16주의 모임이 다 끝나고 나면 내 글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혹 변한 것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변해야 할 곳, 구석구석을 발견하기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하겠다는 어떤 사적인 약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