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있는 월세집을 떠나야 하는 일자가 정해졌다. 드디어 이 갑갑한 원룸을 떠나는구나. 다음 세입자가 정해졌다는 얘기를 부동산 공인중개사에게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공원 뷰, 리버뷰, 이런 건 바라지도 않고 그저 해가 잘 들고 지금보다는 조금 더 쾌적한 환경이면 충분했다.
이 소박한 꿈은 '전세'라는 꼬리가 붙으면 거대하게 몸을 부풀린다. 부동산 어플 속 서울엔 다음 세입자를 기다리는 매물이 넘쳐나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원하는 건 없다. 반지하 제외, 5평 이하 제외, 보증금 얼마 이상 제외. 조건이 더해지면 선택지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내가 뭐 엄청난 거 바라는 것도 아니고! 라고 씩씩대봤자 배만 고파진다. 이게 다 서울에서 값싼 전세라는 허황된 꿈을 좇는 죗값이다.
전세 매물을 찾아 전전한 지 어언 2달이 되어 간다. 이사 날짜가 정해지기 전부터 매물을 수도 없이 봤지만 하필이면 독립 첫 시작지가 송파인 탓에, 매물을 보는 족족 88 올림픽이나 IMF 같은 한반도의 역사를 간직한 빌딩들이 전부였다. 아가씨가 들어와서 벽지랑 장판만 싹 하면 되요! 이게 그런다고 될 일인가 싶은 처참한 내부를 뒤로 한 중개인은 남 일처럼 말했다(실제로 남 일이다).
송파에도 좋은 신축 빌라들이 있지만 문제는 언제나 예산. 눈을 낮추자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눈을 높이자니 돈이 따라가지 않는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두 달이 지났고 어떻게든 이 집을 나와야 하는 일자는 쾅, 눈 앞에 떨어져 버린 상황.
사실 서울에는 집이 많다. 둘러 보면 모든 곳이 사람 사는 건물이다. '싸고 좋은 전세'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쫓아다니는 게 고통의 원인이다. 유튜브 같은 거 보면 다들 괜찮은 전세집을 턱턱 구하는데 내 눈 앞에만 안 나타난다. 유니콘이 따로 없다.
열번째 전세 매물을 보고 돌아오는 차 안. 중개인은 열한번째 매물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질렸는지 '모든 것을 다 만족하며 살 수 없으니 눈을 낮추라'는 말을 했다. 대꾸를 못했다. 엄마에게서도,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숙소가 아니라 2년이라는 기간을 걸고 들어가는 집을 찾는 것인데.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일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이 집이다. 가장 쉼이 되어야 하는 공간이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될 때, 그 외의 일상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 지금 사는 월세집에서 뼈저리게 겪었다. 이 집에서 얻은 피부병은 반년째 나을 생각을 않고 언제까지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할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는 공간에 대한 기준과 눈을 낮추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종국에는 어쩔 수 없는 시간과 예산의 압박에 쫓겨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그전까지는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사막에서 동전을 줍는 기분이라 할지라도 시도도 해보지 않고 눈을 돌리는 것보단 뒤져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덜 억울할 테니. 분명 누군가는 동전을 찾아낸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지금 이 글은 나와 서울에 대한 선전 포고이기도 하다. 사실 매물 찾기에 지쳐서 될 대로 돼라 모드가 된 지 이틀 정도 됐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전투력을 상승시켜도,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거대한 문제는 무기력을 준다. 덕분에 집 청소도 엉망이고 그 핑계로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널브러져 사는 중인데, 그사이 피폐해지는 몸뚱이는 무슨 잘못인가 싶다. 이러면 안 되지, 마음을 다잡으려 글을 쓰는 중인 것이다.
단지 먹고 자는 공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 일상을 탄탄하게 잡아 줄 '집'이 필요한 것이라면 하는 데까지 해봐야 한다. 중개사들이 나의 예산을 비웃고, 빠르게 결정하지 못하는 나의 우물쭈물함에 '뒤돌면 집 없어지는 세상'이라며 겁을 주어도 휩쓸리지 않으려 한다. 누가 살 집이 아니라 내가 살 집이니까.
한 달 정도 시간이 남았다. 서울에도 내 집이 있었다고, 내가 살만한 곳이 있었다고, 한 달 뒤에는 기쁜 마음으로 글을 남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