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라떼
생애 첫 두유는 베지밀이었다. 어딘가 짜쳐 보이는 패키지와 수상스러운 누런색. 마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맛 없지, 백퍼지. 애석하게도 인생엔 먹기 싫은 걸 타의로 섭취해야하는 순간이 있다. 청소년 양수아에겐 어른의 친절에 면역 같은 건 없었고, 간식 주려고 사왔다는 교회 고등부 선생님의 온화한 미소는 당장 먹고 죽을 음식이 아니면 뭐든 입에 넣을 수 있게 만들었다.
결국 짜친 패키지를 웃으면서 받아 들었다. 그래, 설마 하니 못 마실 걸 만들어 팔진 않겠지. 믿어요 베지밀 비! 자라나는 청소년의 믿음은 한 모금 만에 산산조각났다. 우유에 콩즙을 넣고 실수로 설탕을 쏟아부은 맛. 맛없다는 말도 아까웠다. 먹을 수 없는 걸로도 돈을 벌 수 있는 세상. 그 이후 꽤 오랫동안 두유엔 눈도 주지 않고 살았는데 냉장고에 두유가 떨어지면 큰일 나는 성인으로 자랄 줄 누가 알았나. 사람의 입맛은 의외로 가볍고 쉽다.
나는 커피를 언니들에게 배웠다. 표현이 거창하지만 정말 그랬다. 커피보다는 박카스 파였고, 어쩌다 커피를 마시게 되더라도 300원짜리 달달한 자판기 커피가 아니면 마시지도 못했던 청소년 시절. 그걸 지나 대학생이 되고 나니 카페 갈 일이 왜 그렇게 많은지. 친언니처럼 따랐던 G는 나를 카페에 가장 많이 데리고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매번 카페모카에 휘핑을 가득 올려 퍼먹는 나를 볼 때마다 혀를 찼다. 너는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야, 이 어린 녀석아. 커피는 무조건 써야 한다는 그녀의 말은 당시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왜 굳이 돈 주고 쓴 걸 마시는 거여, 안 그래도 쓰디쓴 세상에서.
시럽 없는 아메리카노를 한약과 동급 취급하는 나에게 언니는 케이크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케이크 한 입 하고 아메리카노로 내려. 그렇게까지 해서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하나 싶었지만 달려 다니는 동생 입장에 말대꾸는 쉬운 게 아니다. 시키는 대로 이가 녹을 것 같은 초콜릿 케이크 한 입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나요. 빈 속에 쓰리샷 아메리카노를 때려 박아도 월요병이 해결되지 않는 직장인이 된 건. G는 그렇게 나의 카페인 라이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줬다.
그 새로운 세계에 두유를 끼얹은 건 또 다른 언니 J. 역시나 이십대 초반에 알게 된 그녀는 내가 줄래줄래 잘 따라다니던 이였다. 커피를 사주겠다는 말에 스타벅스에 간 날이었다. '언니 전 아아욥!'하고 얌전히 시켜주는 걸 기다리려는데 J가 아주 특이한 주문을 했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요, 소이라떼에 바닐라 시럽 빼고 하나요. 둘 다 톨 사이즈로 주세요.
뭐지 저 그럴듯해 보이는 주문은. 아무리 봐도 소이라떼라는 건 메뉴판에 없길래 ‘헐 언니 그게 뭐예요?’ 신기해서 물어봤다. J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우유를 두유로 바꾼 거라며, 유당불내증(우유의 유당을 소화하지 못하는 증세)이 있어 라떼는 늘 이렇게 마신다고 말했다. 한 번 도전해 보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마시던 거라는 말이 더 근사해 보였다. 뭐지 이 언니, 제법 그럴 듯해 보이는 걸?! 생전 처음 듣는 낯선 메뉴에서 나는 개멋있음을 감지하고야 만 것이다.
첫 도전 이후 입에도 대지 않았던 두유였지만 한 번은 소이라떼를 따라 마셔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있어 보이는 건 다 따라 해보고 싶은 게 동생들 맘. 그렇게 혼자 스타벅스로 향해 J가 하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생애 최초의 '메뉴판에 없는 메뉴' 주문. 그게 뭐라고 긴장을 해버린 내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몇 년 만에 다시 마주하게 된 두유. 약간의 경계를 가지고 한 모금 들이킨 소이라떼는, 솔직히 인상 깊은 맛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뭐랄까, 우유보다 덜 느끼해서인지 커피향이 진하게 올라오는 느낌 정도. 두유 너 그렇게까지 못 먹을 건 아니었구나. 다른 특별함이 있을까, 몇 번을 더 사마셨다.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열 번 쯤 되자 묘한 고소함에 입맛이 익었다. 그렇게 7년 째, 소이라떼는 내 모닝커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출근 하자마자 두유가 담긴 텀블러에 샷을 내리는 게 일과의 시작. 졸린 얼굴로 두유 팩을 뜯고 있으면 그게 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맛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따라 마셔봤는데 우유보다 더 맛있더라고요!' 말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함께 카페에 가면 오늘도 소이라떼 시킬 거냐고 먼저 물어봐주는 주변 사람들도 많아졌다. 스물 다섯에 처음 만난 소이라떼는 어느새 나를 설명하는 단어가 됐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취향이 있고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등장하지 않는다. 어떨 때는 좋아하던 연예인이 추천한 영화를 보다가, 어떨 때는 동경하는 작가의 인생 여행지를 따라갔다가, 또 어떨 때는 친구나 연인이 즐기던 것들을 함께 누리다 보면 툭 걸리는 것들이 있다. 좋아하는 이가 좋아했기 때문에 좋아하기 쉬웠던 것들. 그걸 한 데 모아 놓고 있으면 어떤 것은 흐려져 사라지고 남은 것들은 뚜렷해져 나의 취향이 된다. 어쩌면 취향이란 만나고 섞이는 사람들과의 촘촘한 교집합들 사이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존재. 그렇다면 '나만의' 취향이란 말은 꽤 자만스러운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퍼스널 옵션을 차지하고 있는 '두유로 바꾼 아이스라떼, 시럽은 없이' 주문서. 그것 말고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의 단어들을 떠올려 본다. 그 단어들이 오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취향의 뜰을 거쳐 왔을까. 자신의 세계를 기꺼이 들여다보게 해준 이들을 만난 행운으로 좁은 본성의 내가 조금 더 넓은 취향의 뜰을 가꿔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커피 세계를 열어준 두 명의 언니들. 그리고 지금 나의 취향을 알게 모르게 가꿔주고 있는 이들. 그들이 있어서 하여간에 난 참 다행이다.
[ 알아두면 쓸모 있나 싶은 오늘의 추천 : 두유 편 ]
참고로 나는 무설탕 두유를 선호한다. 달지 않은 두유는 두유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두유 무관심러라면 아래부터는 하잘 쓸데가 없는 내용이니 쿨한 패스 요망.
1. 매일두유 99.89
일주일에 다섯 번은 마시는 매일두유. 대용량은 두유크림 파스타나 오버나이트오트밀 같은 음식 만드는 용도로 구비하고 작은 팩은 아침마다 회사로 들고 간다. 두유라떼를 해먹기도 하고 간단한 아침 식사와 곁들이기도 한다. 무설탕이라 당류 부담이 적어서 매일 마셔도 좋다. 괜히 이름이 매일두유인 게 아닌 것이지. 가끔 초코우유 쿨타임이 찰 땐 초콜릿맛 두유를 마시는데 여기에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하면 건강한 척하는 카페모카를 만들 수 있다(초콜릿맛 두유는 당류가 꽤 높은 편).
2. 다노샵 심콩두유
콩 씻은 물 맛 계의 0티어. 자연 본연의 맛을 선호한다면 단연 심콩두유다. 진입장벽이 높은 편. 웬만한 밍숭맹숭 맛을 잘 견디는 편인데도 처음 마셨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한 번에 대량 구매했던 탓에 참고(?) 마셨는데 이게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익숙해지고 나면 콩 본연의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입맛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기분. 초심자 두유러들에게는 추천하지 않고 무취무맛을 즐기는 사람(이를테면 그릭요거트에 꿀 같은 건 용납하지 않는 입맛)이라면 도전을 말리지 않는다.
3. 밥스누 약콩두유(오리지널)
매일두유 오리지널 대비 더 고소하고 진하다. 이름 때문인지 마시면 건강해질 것 같은 느낌. 매일두유 보다 덜 마시는 이유는 가격(작고 소중한 내 월급)이 제일 큰 이유지만 라떼로 마시기 매일두유 대비 무거운 감이 있다. 식사를 위해 단독으로 먹긴 딱 좋은 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