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하정우의 [걷는 사람]과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은 적 있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우선 남자라는 점이 있겠지만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 건'기록'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는 점이다.
평소에도 운동과 걷기를 자주 하던 하정우 작가다. 어느 정도였냐면 하루 1만 보 이상은 기본이고
강남에서 홍대까지 편도 1만 6천 보 정도면 간다며 거침없이 서울을 걸어 다녔다. 심지어 강남에서 김포공항까지 8시간에 걸쳐 걸어간 적도 있다.
그래서일까, 저자를 소개하는 글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문장이 있다.
'안녕하세요. 웬만하면 걸어 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그렇게까지 걷는 이유를 물었을 땐, 건강 관리를 위해서라는 듣기 좋은 대답을 했지만 단지 그 목적 때문은 아니었다. 살아 있음으로 걷는 것이고 살아 있는 덕분에 걸을 수 있다는 그의 진솔함의 후일담을 별로 아는 사람이 없다.
허지웅은 수년 전악성 림프종을 앓은 적이 있다. 혈액암의 한 종류로 당시엔 항암 치료를 한다 하더라도 사후 경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막막했다고 했다. 그의 나이 이제 마흔을넘긴 때였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모두 빠져 병실 문 밖을 나가는 것조차 꺼렸다고 했다.
빠져 버린 머리카락에 관한 일화 하나가 있다.
한 번은 자신을 돌보는 간호사 분 께서 침대 옆에 두고 간 모자가 있었는데 처음엔 모든 환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뚝뚝하게 있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 돼서야 그건 자신의 팬으로서 두고 간 선물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고. 그래서 미안함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 그만 시간이 지나버린 그의 이야기. 누군가는 사소한 감정으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감정은 태도다.
글을 완성 짓는 마침표가 될 수 있다. 포기와 원망에서 감사함을 거쳐 결연함으로 무장한 삶의 의지를 세우는 태도다.
이 둘은 걸을 때에도, 병상에 누워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는 중에도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나아가 글에 옮겨 기록으로 남겼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하루의 일기라던가, 진통제로도 막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라던가 하는 자신만의 역사를.
내가 감정에 집중하며 기록을 즐기게 된 동기가 있다. 지방 신문에 기고 한 글이 실리게 된 경력 덕분이다. 당시 직장에서 느끼는 권태와 무료함을 달래려 술로 위로를 받던 때였다.
정도가 심해 결국은 치료센터를 다녀야 했다. 3개월을 다니면서 계속 약과 남의 상담에만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나아질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독서를 추천받았고 하정우, 허지웅 작가의 책을 읽게 됐다.
읽는다 라기보다는 듣는다는 말이 편했다. 눈으로 따라가고 있기는 했지만 마치 두 사람이 옆에 서서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하는 듯했으니까. 한 여름 카페에 앉아 책장을 넘기다가 바지가 땀으로 축축해 잠시 일어나려 해도 더 들어보라며 마음을 붙잡아 뒀다.
어느 날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어떤 삶을 살고 있지?'라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유독 어렸을 적 꿈이 많았던 나는 이것저것에 관심도 많았다. 연예인이 될 수도 있고, 유망한 운동선수가 될 수도 있다 했다. 허탈하게 지금 내가 걷는 길에는 어렸을 때의 꿈은 한 개도 없다.
대신 그런 다양한 경험 때문인지 글을 쓴다. 요즘은 마라톤 준비와 전자책 출간 준비, 공저 출간준비에 바쁘다며 툴툴 대다가도 책상 앞에만 앉으면 마음이 바뀐다. 몇 줄 뚝딱이다.
현재 내 인생의 목표를 담은 4글자가 있다. 독사운여다. 순서대로 독서, 사색, 운동, 여행이다. 나이 따라, 상황 따라, 계절 따라하고 싶은 일을 쫓다 보니 저대로 뜻을 이루어 놓은 바 없어 우선순위를 적어뒀다. 이제야 드는 생각인데 무엇이든 시작하기 전에 독서를 먼저 해보고 간접적으로 경험을 한 뒤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한다. 그럼 조금이라도 방황을 덜하지 않았을까.
10월의 마지막 주 다. 거실 창 밖 나무 잎이 어느새 다 떨어졌다. 올해 남길 수 있는 기록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쓴다. 쓴다는 건 살아있으므로 가능한 일. 죽음 앞에서 쓰기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미적거리며 침대 위 깔아놓은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을 반쯤 덮고 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마침 침대 앞 거울 내 모습이 보였다. 글은 자신의 지금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했다. '어쩌면 계절 탓이 아니라, 마음이 약해진 것일 지도.'
혼잣말하며 거실 식탁으로 발을 옮겼다. 이미 살고 있으니 쓰는 수밖에. 결국 기록은 나를 살리는 의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