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내가 이토록 글쓰기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하루에 한 편씩 잠에 들기 전 일기 쓰듯 남겨놓은 글이 어느새 나를 위로하는 느낌이 들 때 즈음 '내가 정말 글쓰기를 사랑하는구나'싶었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에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고는 모니터 앞에 앉은 걸 보면 무슨 용기인지 싶기도 하다.
이걸 쓴다고 해서 돈을 벌거나 내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그러면서도 올해 여순 한 번째의 수필을 남긴다.(23년도의 기록 의 일부)
작년까지만 해도 시 쓰기에 매진했었다. 하루 한편 쓰기. 그것도 누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고 그냥 출 퇴근길에 생각나는 문장을 메모해 두었다가 살을 더해 한 편씩 써놓은 것이 맨 앞에 번호와 이름을 붙이니 97편이었다. 평균 삼일에 한 편은 쓴 셈이다.
수필은 엄두도 못 냈었다. 시라면 생각을 많이 하면 하는 만큼 좋아진다. 수필은 생각하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는 여럿 수필 쓰기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의 멋진 글을 읽을 때면 '이런 글감은 어디서 얻었지?' '나는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할 기회가 없는데...' 하며 현실을 비난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삶, 어디 하나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내 삶. 여기에 거짓을 몇 줄 더해 상상력이라도 펼쳐 보이면 모를까, 내 실력으로는 상상은커녕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쓰는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고, 쓰는 만큼 그의 행동이 보인다는 것. 사람 됨됨이가 그대로 글에 녹아 있다는 말을 알 수 있게 된 건 수필집을 수 십 권 넘게 읽어본 결과다.
그러므로 여러모로 부족한 나는 수필 쓰기에 앞서 늘 다짐을 한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쓰며, 내 글이 누군가에겐 작은 돌다리가 되어 자신의 특별함에 가까이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대부분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아쉬움, 다짐이 대부분이지만.
나에겐 늘 첫 문장을 시작하는 일이 어렵다. 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첫음절 떼기가 왜 그렇게 힘이 든 건지, 어릴 때 짝사랑하던 이성친구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멀리서 손가락만 조물 거리던 느낌이랄까.
글 쓰겠다고 폼 잡은 지 어느덧 5년 차다. 당시 구입한 고가의 노트북도 얼마 전부터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남의 글만 읽다가 한 줄, 한쪽 써가는 재미를 느낀 올해 들어 드는 생각은 글쓰기 중에서도 수필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은 글이 없고 그만큼 맛이 다양하다.
같은 글감을 읽었더라도 각자의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감상을 존중해 주어야 하니 수필만 한 글이 또 있을까 하는 말이다.
수필 쓰기는 일종의 농사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아직 일구지 않은 밭을 갈아엎고 모종을 심어 물과 비료를 적절하게 뿌리고는 물도 줘야 한다. 가끔 돋아나는 잡초도 뽑아줘야 하고 병충해에 피해 입지 않도록 꾸준한 관리도 필수다.
몇 해전 지인들과 주말농장에 참석한 적이 있다. 대략 20평 정도의 밭에 가지와 수박, 호박, 고추를 심었다. 처음 맨땅을 고를 땐 크고 작은 돌을 골라내느라 손이 아팠는데 이과정은 평소 내 주변에서 나를 혼탁하게 만들었던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이다. 일종의 관계 정리랄까.
사람, 습관, 낭비하는 시간 등. 쓰기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정리함으로서 수필, 아니 쓰기 위한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다. 그 뒤로 적당한 간격을 두며 모종을 심는 건 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글 감을 골라 모니터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이며, 물과 비료는 정성을 들여 한 줄 한 줄 채워 나가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해충에 상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퇴고다. 불순물이 포함되지 않도록 글을 솎아내는 노력인 셈.
글은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왜들 그렇게 '생명력'을 외치는지 이제야 새삼 느껴진다.
그런데도 수필 쓰기에 망설이는 이유, 아니 시작조차 하지 않거나, 나도 쓰는데 당신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 눈앞의 광대한 흰 여백 때문이다. 처음 한글이던, 메모장, 워드 등 문서 프로그램을 켜는 순간 대부분의 글자 크기는 10포인트 내외.
처음 마주 보는 장면은 흰색은 종이요, 깜박이는 것은 마우스의 커서다. 아마 모르긴 해도 40줄, 글자 수로 하면 공백 포함 A4용지 한 장기준으로 800 ~1000를 채워야 한다.
'아니, 내가 무슨 글쓰기를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씁니까?. 최근에 글이라고 쓴 거는 SNS에 사진 올리다가 몇 줄이 다인데.'
팁을 이야기하자면 수필을 쓰기 위해 필요한 건 반드시 글씨 크기가 10포인트도 아니고, 양을 가득 채울 필요가 없다. 단지 몇 줄 내가 경험한 것,
SNS에 올렸던 그 과정도 다 수필인 셈이다.
즉, 흰 여백에 처음 글을 쓰려거든 글씨 크기를 키워서 써라. 양을 채우려 바둥거릴 필요도 없다. 쓰고 즐기면 그만이다.
둘째. 특별함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완성된 글을 읽지 마침표를 찍어놓지 않은 글을 읽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수많은 생각과 수 십 번의 퇴고를 거쳤을 터다.
올해 수필 쓰기에 관심을 더 두면서 항상 손에서 놓지 않는 책이 있다. 좋은 생각과, 에세이, 샘터라는 월간 잡지다. 매달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이야기가 실린다. 나는 올해 1월부터 매달 서점에 들러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러니 한 건, 대부분의 이야기가 늘 내가 겪었던, 혹은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추운 겨울엔 과거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떡볶이의 매운맛이 생각난다는 내용, 혹은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의 옛 추억 등등. 누군가에게는 쉽게 잊힐 만한 평범함이지만 쓰면 특별함이 되는 순간이다.
이렇듯 수필은 내 주변에서 있었던 일 중에서 하나를 골라 종이에 혹은 스마트폰 액정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나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함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어떠한가.
셋째.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에게 쓰면 된다. 친한 사람과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할 땐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몸이 가까이 기운다. 눈을 바라보고 눈과 입을 번갈아보며 어떨 때에는 고개도 끄덕이고 손 뼈도 친다. 그게 대화다.
이건 조금 낯선 사람이라도 똑같다. 적어도 한 명, 두 명, 세 명, 가까이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거리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공감을 해줄 것이다.
반면 사람들이라면? 열 명,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발표를 진행한다면? 그땐 어떨까?. 수필은 발표가 아니다. 나의 경험담이다. 이야기이고, 대화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거나 검열을 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을 옆자리에 앉혀 놓았다고 생각하고 혼잣말을 이어가면 된다.
그래서 수필 초고 쓰기는 입으로 쓴다는 말이 있다. 중얼중얼 거리는 거다. 편한 마음으로 쉬지 않고 친한 친구와 하듯.
마지막으로 수필은 진실성을 바탕으로 공감을 담아내야 한다. 청자의 감동은 그들만의 다음 몫이다. 예를 들어 영화 마블의 등장인물싀 이야기, 로봇 영화의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는 허구가 바탕이다. 그걸 보고 우리는 공감이라고 하지 않는다. 재미라고 말한다. 장르 또한 SF, 공상, 과학 등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은가.
공감이란, 사람이 사람의 글을 읽음으로써 '나도'라는 느낌의 씨앗을 마음 한구석에 심어두는 일. 그것이 수필의 역할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도 내 주변의 평범함을 쉽게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와 둘째도 모든 일상을 써보겠다는 마음, 그리고 내 삶이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지극히 평범했던 내가 수필을 쓰다 보니 내 삶이 조금은 특별하다는 걸 쓰면서 느끼는 중이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내디뎌 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글쓰기의 매력을 내 주변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을 갖는 것. 그 과정에서 내 삶을 계속 돌아보며 고민하는 것이 나만의 글 쓰는 비법이라면 비법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