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하기 전까지 빨리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만 할 수 있다면 그냥 좋았다. 무엇이 좋았을까? 직접 돈을 벌고 내 가 가고 싶은 곳, 가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음식, 사귀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수능 시험 점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재수를 택한 반 친구들도 많았지만 일찍이 대학 수시에 합격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친구가 부러웠다. 대학 입학 전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돈을 모아 해외여행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땐 부러움 보다 내 현실을 원망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기업의 임원이었으므로 굳이 직접 돈을 벌지 않아도 됐다. 그 친구의 말 한마디가 의도치 않게 나에겐 열등감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구를 보며 돈 버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아저씨 K가 있었다. 성함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집으로와 장래희망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선명하게 남았다.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한국 군인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돼서야 ' 카츄샤'라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저녁 시간 아버지와 술자리 하고 있는 아저씨를 볼 때면 '언제 가시려나' 하고 기웃거렸다. 매번 용돈이라며 만 원짜리 몇 장을 손에 쥐어주셨기 때문이다. 받아도 되나 하고 어른들의 눈치를 봤지만 처음이 어려웠지, 나중 되니 은근 기대 했다. 그동안 부모님께 받지 못한 액수였다. 온 친척이 모이는 명절에도 이 만큼은 받지 못했다. 얼떨떨했고 감사했다.
그 돈으로는 그동안 완부점에서 구경만 하던 조립형 로봇이며, 만화책을 사는데 썼다. 돈이 있어야 이런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능 시험을 성적 발표 후 나는 지방대학을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차라리 일찍 입대하는 건 어떻겠느냐, 공장에 취업하는 건 어떻겠느냐라고 했지만 계속 부모님 밑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입학했다.
기숙사비며 용돈을 지원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국가 장학금제도를 알아둔 뒤였고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마련할 계획을 했으므로 상관없었다.
K아저씨가 날 찾아왔다. 퇴근길에 잠시 들렸다고 했다. 평소 부모님과 나눌 수 없는 대화를 했던 사이라 어색하지 않았다. 어떨 땐 차라리 이 사람이 부모였음 했다. 돈도 많았고 똑똑했고 내 말도 잘 들어줬다.
아저씨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아저씨는 내 말을 자르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끄덕여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저씨는 '지금 보다 10년, 20년 후의 삶을 상상했음 한다.'며 이번에도 용돈을 쥐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