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기억은 아련하다. 더욱이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스민 여행지는 낯설기보다는 감명 깊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익숙한 풍경으로 그려진다. 대구의 청라언덕이 그러하다. 야트막한 언덕에 작곡가 박태준의 첫사랑 이야기가 푸르게 뻗은 담쟁이 잎처럼 아름다운 사연을 깔기 시작한다.
한 소년이 좁고 긴 90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오늘도 교회의 오르간을 쳐야 하기에 한숨도 안 쉬고 올라가는 계단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 오솔길로 몰래 다녔다. 지금은 그 오솔길이 사라졌지만 좁은 길은 여전히 남아있는 계단길이 90 계단길이다.
교회에 들어가 오르간 앞에 앉았다. 긴 한숨을 내쉬고 오늘따라 유독 반짝 거리는 건반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반듯한 느낌의 건반이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 두 손을 올려 길고 높은 창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맞으며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합창단원들의 곱고 아름다운 선율이 건반 소리에 섞여 강당을 울려주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음악에 취해 오르간을 치고 한숨을 돌리는 순간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느 여학생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하얗고 정갈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여학생을 바라보는 순간 오르간을 쳐야 한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었다. 심장이 꿍꽝꿍꽝 마음속에 건반을 힘차게 내리치듯 두근거리고 그 소리가 밖으로 나와 들킬까 봐 같아 얼굴이 후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학생의 얼굴이 지워지기는커녕 더욱더 또렷이 비쳐 잊히질 않았다. 세수를 하려는 대야의 물속에도 비치고 깜깜한 밤 천정에도 가을바람 날리는 창가에서도 나를 차분히 바라보던 그 여학생의 얼굴이 보여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자마자 허둥지둥 가방을 챙기고 학교로 향했다.
“아침은 먹고 가야지.”
뒤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소리를 뒤로한 채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은 90계단의 좁은 길을 한달음에 올라가 교회 앞에 서 있었다. 아침에 서둘러 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이곳에 이 시간에 서있는지는 모르지만 교회 앞에서 바라보는 대구시내와 그 여학생이 다니는 신명학교가 한 폭의 봄 수채화처럼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오늘은 그 여학생을 못 보았다. 학교를 일찍 가나? 오늘은 학교를 쉬나?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여학생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발걸음을 돌리기가 일쑤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음만큼 바쁘게 제일교회 합창실로 향했다. 그곳엔 제일 좋아하는 오르간과 음악...... 그리고 가끔 교회에 나오는 그 여학생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거친 숨을 돌리고 건반에 손을 올렸다. 유독 신나고 손끝이 아플 정도로 힘을 주며 건반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합창단원 사이로 살포시 미소 지으며 노래를 하는 그 여학생을 바라보며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연주 사이사이 여학생을 바라볼수록 몸은 공중에 붕 떠있고 머릿속에 악보는 사라지고 노래를 부르는 합창부 학생들도 보이질 않는다. 점점 더 연주에 힘이 가지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오르간을 연주했다.
“오늘 태준의 오르간 연주는 최고다.”
“요즘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닙니까.”
합창 부원들의 이야기가 마치 속마음을 들키는 듯 창피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시 쉬는 시간에도 오르간 앞에 앉아 악보만 내려 보고 있었다. 합창 부원 뒤쪽 그 여학생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합창단원들에게 자두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오늘 너무 열심히들 하셨으니 자두 드시면서 하세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는 여학생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꿍꽝 질 치는 소리가 들킬까 봐 다가오는 여학생을 뒤로한 채 쫓겨 나오 듯 제일교회 잔디밭으로 뛰어나왔다. 언제 다시 들어가야 할지를 몰라 먼 하늘만 바라보며 푸른 잔디에 벌렁 누워 야속한 구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교회 합창실로 다시 들어갔을 땐 이미 강당은 텅 비어있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악보를 챙기려 오르간 앞에 갔을 때 하얀 손수건에 싸인 자두 두 개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차마 손으로 덥석 만질 수가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하얀 손수건에 쌓인 자두를 잡았다. 진땀이 난 손으로 잡은 손수건은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한편에 하얀 손수건에 쌓인 자두를 올려놓았다. 나중에 다 시들어진 자두의 꼭지도 얇은 습자지에 포장해 책상 한편에 올려놓고 여학생의 손수건과 함께 놓아두었다. 받은 손수건은 그 여학생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건을 건네주려고 오르간을 치면서도 늘 시선은 제일교회 창으로 보이는 언덕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학생이 지나갈 때쯤이면 언덕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여학생을 찾기도 했다. 건네 줄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지나갈 그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꼬깃꼬깃 해진 손수건을 줄 수가 없어 해지기 전 집으로 돌아온 적도 많았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 노산 이은상은 태준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태준 선생 그래서 그 여학생은 만나셨나요?”
“네 만났지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선명하게 그 언덕 위에 제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날은 손수건을 꼭 전해줘야 할 거 같아 작정하고 오후 내내 언덕에 앉아 여학생을 기다렸지요.”
“그때가 아마 5월 중순쯤 되었을 거예요.”
“그때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 라일락 이파리를 물으면 첫사랑의 맛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 학생을 기다리고 있자니 그날따라 유독 라일락 이파리가 제 앞에서 나풀거리더라고요. 그래서 호기심 삼아 하나를 따서 입안에 넣고 씹어 보았지요. 순간 쓴맛도 아니고 신맛도 아니고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워졌어요. 맛이 써 인상을 쓰고 입을 뱉으려 하는데 그 여학생이 제 앞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그냥 다가오는 그 여학생에게 고개를 떨어뜨린 채 손수건을 건네주며 라일락 고마워요. 그 한마디 남기고 도망치 듯 좁은 90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왔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얼마나 창피한지......”
수 없이
“자두 고마웠어요.”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수없이 속으로 되새긴 말들은 다 어디 가고 라일락 고맙다니 지금도 생각하 면 참 어수룩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 여학생을 만나면 얘기해 주고 싶어요.”
“자두 참 잘 먹었습니다.”
“자두를 싸 주신 손수건의 정성도 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저에겐 참 고맙고 행복한 시간이었던 같습니다. 하고 잔잔한 미소와 함께 눈을 마주치며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
이야기를 하는 내내 태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고 얼굴은 월포 노을이 스민 듯 붉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태준 선생 잠깐만요. 갑자기 태준 선생에게 어울리는 글이 생각났어요.”
노산은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거침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박태준의 동무생각-
태준은 집으로 돌아와 노산이 적어준 가사를 바라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태준은 노산이 적어준 가사에 오선지 속에 악보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까만 밤 어둔 조명 아래 악보를 그리는 박태준의 방에는 그 시절 파란 담쟁이가 언덕을 배경 삼아 휘날리기 시작했고 마냥 기다리는 한 학생과 다가오는 한 여학생의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