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든기억 깨우기 Jun 09. 2022

연애의 법칙

참고서를 많이봐야 좋은대학 가 듯 연애를 많이해야 결ㅇ혼을 잘 한다.

일 년에 하루는 강연 준비로 바쁜 날이 있다. 학회가 열리는 날이다. 학회에서 학술 책임을 맡고 있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날이다. 점심시간도 지났지만 빵 하나로 대충 때우고 포스터 심사장으로 자리를 급히 옮겼다. 복도에 길게 전시된 포스터 심사장에 가면 발표자가 한 명씩 발표를 하고 질문도 주고받는데 포스터 저자에 낯익은 이름하나가 씌어있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인데 여기서 그 이름을 또 보게 된다니….

멍하니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대표 저자가 말쑥한 정장을 입고 내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하고 포스터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순간 30여 년 전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포스터 앞의 키오스크가 마치 영화의 스크린처럼 선명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포스터 발표자는 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 친구였다.   

   


쌀쌀한 3월 교수님의 대학 첫 수업이 끝나고 학교 잔디밭에 둘러앉아 한 명씩 자기소개의 시간을 갖게 해주셨다. 가뜩이나 내성적인 데다가 말도 못 하는데 처음 보는 애들 앞에서 자기소개도 하고 노래도 한 곡씩 해야 하니 내 순서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벌써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내 순서가 되자 머뭇거리며 일어나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디 학교를 나왔고 어디 살고 대충 얼버무리고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이라는 노래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충 불렀던 기억이 난다.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몇 명의 자기소개가 끝난 후 한 여학생이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얘기하는데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가슴 한편이 쿵 하고 내리 찍히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 멍하니 그 친구만 한없이 바라보게 되고 얼굴만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에게 그 친구는 어디 사는지 어디 학교를 나왔는지 물어보고 그 친구에 대해서 틈만 나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친구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두리번거리다 한 학기를 다 보내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장학금 준다는 말에 공부로 장학금을 받지 못할지언정 일이라도 해서 어머님께 잘난 아들도 대학 가서 장학금 받았다는 소리를 듣게 해주고 싶어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는 열람실 청소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그 친구가 혼자 공부를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 너 웬일이니? 난 여기서 아르바이트해서 매일 나오는데 넌 어디 놀러 안 갔어?”

 그 친구도 딱히 갈 때도 없고 심심해서 나왔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그 친구와 같이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점심도 같이 먹고 알게 모르게 사서 선생님과도 친해도 방학 내내 같이 지내게 되었다. 개강 후엔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등하교를 같이 하게 되면서 친하게 지내게 됐다. 학교에 가는 하루하루가 왜 이렇게 재미가 있었는지 집에 오면 내일 학교 갈 준비로 바쁜 저녁을 보내기 일쑤였다. 졸업 후에는 그 친구는 일찍 취업하게 되었다. 나는 입대와 공부를 더 하게 되어 그 친구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몇 해 지나 지방 대학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흐지부지 말도 몇 마리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서울로 직장을 잡아 더욱 연락하기는 어려워졌고 동창회에도 그 친구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런 그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포스터 발표장에서 바로 코앞에서 본 것이다. 그것도 말쑥하게 차려입은 단아한 모습의 친구를 말이다. 그 친구에게 달려가 잠깐 시간이 되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랫만인데 커피 한 잔 할래?”

“괜찮지 우리 저쪽 가서 커피 한잔하자”

그 친구와 나는 커피를 한 잔 뽑아 학회장 앞의 넓은 잔디밭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한동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했다는 소식과 아이들 이야기 등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저 멀리서 간사가 급히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금방 갈게”

“어떡하지 가야겠는데”

“괜찮아 나도 차 시간 때문에 내려가려는 참이었어”

 그 친구와 그렇게 헤어지려고 하는데 나는 그 친구한테 오래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 하나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볼지 몰라 머뭇거리다 그 친구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나랑 결혼할 생각은 없었니?”

그러자 그 친구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고 있었다.

“궁금해?”

“지난 일이긴 한데 갑자기 널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그 친구는 나에게. 

“내가 너를 좋아한 마음이 네가 나를 좋아한 마음보다 더 컸을 걸“

아! 이게 뭔 소린가? 한방 얻어맞은 말이었다.

“그럼 나랑 잘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 됐지?”

하고 내가 묻자 그 친구가 대답했다.

“너는 그때 아직 남자가 아니었어.”


아! 맞다 내가 그렇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수룩한 시절이었다.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내가 대학 들어가자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 적극적으로 내 속내를 얘기 못 했나 보다. 지금도 내성적인 성격으로 아쉬움이 남는 추억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다면 어떡했을까? 이미 지난 시간이고 다시 돌아간들 그때의 감성이 남아있지도 않아 그 시절의 추억이 오히려 사라질 거 같다.     

가끔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강의할 때도 마지막 수업 시간엔 연애학 특강을 해주곤 한다. 아이들에게 ‘여자 친구 있냐 남자친구 있냐’를 늘 물어본다.

“좋은 참고서를 많아 봐야 좋은 대학에 가듯이 연애를 많이 해야 좋은 반쪽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내가 연애를 많이 못 해보기도 했고 아직도 낯선 장소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어색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하는 내 성격 때문이다. 젊은 시절 아쉬운 사랑을 해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젊은 시절에 연애를 많이 못 해본 건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만약에 나 같은 교수님이 참고서 좀 봤냐 하고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 같다.

“저는 교과서에 충실했어요. 하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장원의 잠든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