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 실려와도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들

by 백작가
강풍으로 통제된 플리머스 시내 중심가인 로열퍼레이드. copy right 백작가

영국에 처음 들어 온 후 이주일 쯤 된 3월 중순 이었다. 차를 사기 전이라 주로 버스를 이용했을 때다. 시내에서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갔더니 왕복 8차선 도로 양방향이 모두 통제되어 있었다.


시내 중심부의 로열퍼레이드란 도로로 우리나라의 광화문 대로 쯤 되는 가장 넓고 항상 붐비는 곳이다. 심지어 어느 구간은 보행자들도 통제했다. 처음에는 무슨 영화촬영을 하나보다 했다.


현장에 있던 공무원한테 물어봤더니 시내 중심부에 있는 대형 옥외 스크린이 바람에 날아갈 위험이 있어 도로를 통제했다는 것이다. 어리둥절했다.


나는 할 수 없이 20분 이상 걸어서 다음 버스정류장까지 이동해야 했다. 무엇보다 놀란 점은 그리 세지 않은 바람에 스크린이 날라갈 것을 우려해 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메인 도로 전체를 통제했다는 것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런 불편에도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통제가 풀리길 도로에 서서 기다리거나 한참을 걸어서 다음 정류장까지 이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일로 퇴근시간에 도로 전체를 통제하는 일을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항의를 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강풍이 불고 추운 날씨 속에 불편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넘기는 영국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국 보행자들은 신호등을 잘 안 지킨다. 빨간 불에도 차가 없으면 그냥 차도를 건넌다. 처음 영국에 와서는 위험천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도 운전을 해보니 왜 그런 지를 알 수 있었다. 이 곳의 운전자들은 시내주행 시에 양보하는 습관이 체질화되어 있다. 도로가 좁은 데다 도로 양쪽에 주차를 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 쪽 차가 양보를 안하면 다니기 힘든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반대편 운전자에게 서로 수신호를 자주 보낸다. 이 신호는 대부분 양보하겠으니 먼저 가라, 고맙다 등의 의사표시다. 보행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건널 낌새만 보이면 진행할 수 있어도 멈춰선다. 클랙숀은 운전중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하는 용도로 쓴다. 웬만해서는 시내에서 울리는 경우가 없다.


이런 운전 습관은 도로가 좁은 환경 탓도 있지만 비교적 관대하고 배려가 생활화되어 있는 영국인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


다만, 이런 영국인들도 고속도로로 나가면 마치 F1 드라이버처럼 과속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영국에서 운전할 분들은 잊지 말기 바란다.


영국인들의 느긋한 모습은 병원 응급실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영국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 됐을 무렵 지독한 몸살 감기에 걸렸다. 온 몸이 쑤시고 두통이 심했다.

원래는 내가 등록해 놓은 GP(General Practitioner, 동네 가정주치의)로 가야 하나 주말인 지라 시내에 단 한 곳 뿐인 대형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안내 데스크에 “너무 아프다”고 말을 하니 기다리란다.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부르질 않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 코가 깨져서 출혈이 있는 사람, 손을 크게 베어서 붕대로 지혈을 한 채 응급실을 찾은 사람들이 모두 편안히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에서 피가 나고 있는 데도 처음 본 옆 환자랑 농담을 하며 웃고 있는 것 아닌가.


의료 시스템이 우리나라와 달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응급상황에서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은 영국인들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난 어떻게 됐냐고? 세시간 가량을 기다려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다며 못 참겠으면 수퍼에 가서 진통제를 사먹으라고 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영국에선 웬만한 감기에는 약을 처방해주는 경우가 드물다.


아이들이 열이 나도 저절로 나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수퍼에서 간단한 진통 해열제를 사 먹일 뿐이다. GP에 가면 감기의 증상별로 저절로 나는 데 걸리는 기간이 써 있다. “목감기는 일주일, 몸살은 이주일 등등”


결국 나는 못 참고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먹었지만 몸살에서 회복하는 데 GP에 써있던 대로 딱 이주일이 걸렸다.



이전 06화나의 사랑 나의 정원... 영국의 주거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