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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Jan 09. 2021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파주 헤이리, 임진각에 가다.


“지금 울고 계세요?”
달리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흘리며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만 ‘흑!’ 하고 울음을 토해냈다. 질문을 했던 사람도, 나도 당황하여 한동안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볍게 들른 방문이었는데 내 마음은 깊은 수렁에 빠져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며칠 전 합숙도 끝나고 새로운 학기를 계획하고자 여덟 명의 스텝들이 수련회를 떠났다. 장소는 파주 헤이리 마을. 유니언 학생은 여행을 갈 때나 수련회를 떠나기 전에 여러 가지 조사를 해야 한다. 가는 목적, 기간, 금액, 여행 일정 등을 말이다. 스텝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헤이리 마을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았다.
 헤이리란 순수한 우리말로 파주의 전통 농요인 '헤이리' 소리의 후렴구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얼씨구 좋구나 등의 기쁨을 나타내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마을을 조사하는 내내 헤이리라는 후렴구가 절로 터져 나오는 듯했다.

(재미있는 지명이야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헤이리 국토교통부 티스토리)


 우리의 일정이 빠듯한 만큼 가 볼 곳을 꼼꼼히 챙겨서 보았다. 미술가, 음악가, 건축가등 약 4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드넓은 공간에는 각종 박물관, 전시장 및 게스트하우스를 비롯하여 카페와 레스토랑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수련회를 떠나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헤이리 마을 한복판에서 예술품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헤이리 마을 예쁜 숙소에 도착한 첫날은 3박 4일 동안 먹을 간단한 야식거리를 사러 마트를 찾았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평가와 계획'이기 때문에 가급적 요리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의 장바구니는 6박 7일 정도의 양이었다. 양식 거리를 정리한 후 각자 조사해 온 내용을 바탕으로 여행 일정을 짰다. 파주에 왔으니 둘째 날 오전엔 임진각에 가고 오후엔 근현대사 박물관 탐방, 저녁엔 지난 학기 평가, 셋째 날 오전에는 자유여행, 오후엔 프로방스에서 카페 투어, 저녁때는 새 학기 계획, 마지막 날엔 여유 있게 브런치를 하기로 결정했다. 꽉 짜인 것 같지만 여유도 있고 알찬 계획이라 모두 찬성이다.

임진각 가는길


 평일이라 그런가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여유로웠다. 뻥 뚫린 도로에 앞서가는 차도 없었다. 이대로 북한까지 달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임진각으로 가는 도로 위에서 신이 났다. 내친김에 곤돌라도 타기로 했다. 바닥이 시원스레 뚫린 곤돌라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 북한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이 사람을  ~~요~"

갑자기 들려온 노래.

순간 남북 이산가족 찾기 때 너무 많이 들었던, 그래서 울다가도 싫증 났던 노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남한 내에 흩어진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1983년  6월부터 그해 11월까지 방영된 특별 생방송이었다.
원래는 라디오에서 10여 년간 해왔던 내용이라 간단하게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동일한 내용으로  453시간 45분을 생방송으로 이어갔다.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고 한다.

 

 황해도가 고향이신 아버지는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6.25에  참전하셨다. 휴전선이 그어지고 남한에 남은 아버지는 고향에 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큰 형님의 아들과 함께 국군에 참전했지만 전쟁통에 헤어지게 되었고 30여 년을 생사를 모르고 살아갔다. 아버지는 매년 이곳 임진각에 오는 것으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설움을 달래곤 하셨다.

  1983년. 그러니까 내가 고3 때이다. 조카를  찾고 싶은 아버지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에 신청을 하셨고 우리 가족은 TV 앞에서 아버지의 방송 출연과 아버지의 조카가 나오는 지를 지켜봐야 했다. 24시간 생방송이라 가족은 시간을 분배하여 돌아가며 TV를 시청했다. 아버지는 TV에 2번 출연하셨지만 어디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외로움은 더 심해지셨고 일 년에 한 번 찾던 임진각에 자주 다녀오셨다.  

 

  그때는 실향민들과  아버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저 고3 딸을  TV 앞에 내몰았던 가족이 야속하기만 했었다. 오랫동안 생사를 모르고 지냈던 가족을 만나 서럽게 울부짖으며 포옹하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찡하며 함께 눈물 흘렸지만 TV 보는 게 일이 되고, 오랫동안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게 되고 보니 혈육을 찾는 것도 시들해졌다. 그냥 포기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TV도 건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생방송도 끝이 났다.


  아버지는 애타게 찾던 단 하나뿐인 혈육을 끝내 찾지 못하고 이천 호국원에 묻히셨다. 임진각에 다녀오시던 날은 한없이 우울하셨고 식사도 못하셨던 아버지의 눈물 어린 한숨이 들려오는 듯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안타까워서 그냥 눈물만 나왔다. 멈추려 했는데 멈춰지지 않았다. 래서 그냥 울었다.

한. 없. 이...


  의 글은 2020년 7월.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을 즈음 임진각에 다녀온 날 썼던 글이다. 일정이 바빠 완성을 못하고 작가의 서랍에 담아 두었

며칠 후에 아버지 생신이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마음이 먹먹해 와서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으로 마무리를 해본다.

 코로나로 인해 아버지에게뿐만 아니라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도 찾아뵐 수 없는 현실이 속상하고 안타워 눈물이 난다.


하늘로 보내는 편지


2015년 6월 6일 현충일에 SNS에 올렸던 글도 옮겨본다.

 뉴스를 보아도,  마트에 가도 온통 메르스 이야기뿐이다.   현충일을 맞아 이천 호국원에 간댔더니 사람 많은데 가면 안된다고 만류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오늘만을 기다려오신 엄마가 어젯밤부터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모습을 보고 가기로 결정을 했다.

다행(?)인가? 고속도로가 비교적 한산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장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넓은 곳에 주차를 하고 아버지 묘소로 향하는데 '하늘로 보내는 편지'를 쓰는 곳이 있었다.

엄마에게 쓰시라 했더니 '나 좀 빨리 데려가 주오' 라 쓰신다...

"여기 오신 어르신들은 다들 그렇게 쓰시네요.."

옆에서 지켜보시던 아저씨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하신다.

'아버지, 엄마를 건강하게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사랑' 앞엔 메르스도 무섭지 않다.


  5년 만에 다시 더 큰 슬픔이 왔구나. 그때를 잘 이겨냈던 것처럼 코로나도 잘 극복하기를~

오늘은 아버지와 엄마,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과 딸을 생각하며 펑펑 울어야겠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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