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설레었다. 고향을 방문하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1박 2일간 그녀를 만난다는 두근거림일까. 여행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 하지만 출발 시간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았다. 남편을 위해 냉장고에 채워 넣은 반찬 가짓수를 확인하고, 주방도 한 번 더 정리를 하고, 책을 읽다가 멈춘 듯 제자리걸음인 시계를 보며 때 이른 출발을 하기로 했다. 승용차로 가면 한 시간 반 조금 넘을 거리를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니 세 시간은 족히 예상해야 한다.
사당행 버스는 기다림 없이 다가와 너른 좌석을 제공했다. 이른 아침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피곤한 듯 명상 중이다. 유독 한 사람만 깨어서 통화 중이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대화인 듯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프리지어 향이 난다. 4호선 전철 안은 한산 하다. 창동까지 가는 동안 책을 여러 장 넘겼다. 그러나 1호선 소요산행은 더디다. 마치 ‘그쪽으로 가는 전철은 아직 개통되지 않았어요.’라는 착각을 갖고 재차 확인하게 한다.
한참을 기다려 다가온 소요산행엔 어르신들이 많아 고향냄새가 난다. 단풍색 등산복이 산의 힘을 실어 온 듯 목소리들이 활기차다.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커다란 보따리들은 어릴 적 읍내 장날을 기억나게 한다. 가까스로 앉은자리에선 차창 밖을 볼 수 있어 고향 풍경 그림 찾기 놀이를 했다. 끝도 없이 스치는 푸른 산자락, 줄지어 서서 인사하는 나무들, 대화하듯 옹기종기 몰려 앉은 지붕 낮은 집들... 하지만 전철의 빠른 움직임이 나를 자꾸만 낯선 곳으로 데려가는 듯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 길을 비둘기호 기차로 느리게 달렸는데 전철은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호를 탄 듯 목적지를 향해 질주를 한다.
소요산역에 도착하니 종착역이라는 안내원의 방송에 따라 모두가 밝게 인사하며 내린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친구가 되는가 보다. 푸근함을 담아 역을 나왔는데 황량함과 낯섦에 바람도 차다. 너무 일찍 출발한 탓에 그녀를 만나려면 한 시간 반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
소요산역 입구에서 올려다보니 하얀 위령탑이 웅장하게 서 있다. 그곳을 올라가 본 지 30년은 됐으리라. 바람이 이끄는 대로 하얀 탑으로 발길을 옮겼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6.25 참전비다. 룩셈부르크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친구를 위해 참전비 사진 한 장 찍어 보냈다. 초등학생 아들이 학교에 가서 자랑할 거라고 했다며 고마워한다. 그것으로 할 일을 마쳤다. 찬바람이 미처 녹지 않은 눈과 함께 휘감아 불어온다. 옷 속으로 스미는 으슬바람에 산행은 포기하고 돌아 내려왔다. 좀 전 까지만 해도 참전비 내용을 읽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의 가방에서 ‘이 나이가 어때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따뜻한 카페 한쪽에서 진한 쌍화차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린다. 오랜만에 만난 듯한 할머니 두 분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인다. “우리가 얼마나 산다고 연락 좀 하고 살자” 따뜻한 대화를 엿들으며 겸손히 미소를 보낸다. 시골의 조용하고 작은 카페는 아직도 80년대 다방 냄새가 나서 좋다.
기다리던 그녀가 왔다. 그녀의 하얀 차에 몸을 싣고 고향 방향으로 달린다. 구불구불하던 옛길이 4차선으로 바뀌고 시원스레 걸쳐진 다리가 한탄강을 품고 있다. 선이 굵은 38선 돌비석이 반갑게 손짓을 한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늘 가슴 시리게 바라보던 돌비석이었는데 고향에 왔음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38선을 지나 재인폭포로 향했다. 30여 년 전에 가 본 곳인데 아무리 추억을 되짚어 보려 해도 낯설기만 하다. 우거진 풀 숲 사이로 새파랗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기대했지만 폭포 근처까지 이어진 계단과 산책로가 낯설게 반긴다. 하얗게 얼어붙은 폭포수 그 사이로 간신히 흐르는 물이 폭포라는 이름의 부끄러움을 덮어 준다. 산자락도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실핏줄처럼 서글프게 저녁노을을 품고 있다. 폭포 주변엔 단풍나무들이 힘겹게 붉은 잎들을 붙잡고 있다.
재인의 한 맺힌 죽음을 고하려는 그의 아내의 외침이런가. 자신을 탐하여 남편 재인을 죽게 한 사또의 코를 물어 원수를 갚으려던 아내의 절규인가. 얼어붙은 미끄러움 때문에 폭포까지의 걸음을 차가운 자물쇠로 묶어 놓았다. 용암이 식으면서 광활한 용암대지가 형성되고 조각하듯 파내고 깎은 듯한 주상절리 절벽은 내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고향집 가까운 곳에 차탄천이 있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차탄천에서 여름을 난다. 물오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물을 좋아하는 나는 방학만 하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 강에서 살았다. 주상절리로 깎아지른 절벽은 남자아이들의 절벽 타기 놀이로 안성맞춤이다. 나도 그들과 끼어 절벽 오르기를 하고, 강을 가로질러 수영하여 건너편 절벽을 치고 오는 놀이를 즐기며 새까맣게 그을어 갔다. 어릴 때만 해도 모든 강의 구조가 그렇게 생겼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계곡의 정취에 감사가 절로 나왔다. 폭포 아래까지 내려갈 수 없어 계단 난간에서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물 많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을 기약하며 폭포와의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돌아오는 길에 조선왕가라는 한옥의 커다란 통나무 문을 밀어 본다. 조선왕가는 1935년 고종황제 영손으로 종묘제례를 관장한 이근이 처음 건축한 집이라고 한다. 원래 서울 명륜동에 있던 것을 2008년 6개월 동안 해체하여 이곳에 이전 및 복원을 했다고 하는데 1900년대 황실가의 전통 한옥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거기서는 숙박과 미술관을 겸한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우아한 저녁식사를 기대하며 조선왕가 아낙처럼 여유 있게 계단을 오른다. 하지만 예약하지 않아 우리의 저녁은 사진 몇 장 담는 것으로 대신해야만 했다. 항아리와 기와, 통나무 대문이 고향의 낯설었던 마음에 풍요로움을 대신해 준다.
축복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식당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매콤한 주꾸미 볶음에 밥 한 공기 쓱쓱 비벼 거뜬히 해치웠다. 뜨끈한 바지락 칼국수는 매운 속을 시원히 달래주며 아직도 낯선 곳에서 긴장의 끈을 풀어놓는다.
수원이 고향인 그녀의 연천 집에, 연천이 고향인 내가 수원에서 달려와 그녀의 아담한 은신처에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이제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그녀는 시계의 작은 바늘이 12를 가리킨 지 한참 지나도록 누에가 실을 자아내듯 끊김이 없다. 그녀의 작은 노트북을 열자 그 속에서 이야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로 들으니 더욱 감미롭게 뇌를 자극한다. 달콤한 사랑고백을 듣는 것 같아 황홀하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지냈을까. 그녀의 가슴은 수많은 언어를 담고 있었다.
밤새 그녀의 가슴속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른 아침. 철들지 않은 아이들에게 달려가 푸근한 엄마 노릇, 야무진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을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뒹굴거리고 있었다. 밤새 두툼한 책 한 권을 읽은 느낌이다.
그녀가 간 거리로 나섰다. 안개가 자욱하게 앞을 막아선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있는 한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버스 타는 곳으로가는 동안 안개가 걷힌다. 고향 하늘이 예전처럼 파랗게 얼굴을 드러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