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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Feb 10. 2021

차가운 거리에서 만난 '엉따'

기다리던 버스가 왔는데 기분 나빴던 이유

  일주일에 두 번씩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내가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종점인 30번 버스는 간혹 15분 이상을 기다리게 합니다. 딱히 시간을 정해놓고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버스가 늦게 오는 것은 참을만합니다. 하지만 날씨가 추운 날.
대합실 안으로 세찬 바람이 몰아치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집니다.

"오늘은 돌풍을 동반한 바람이 불어 올 예정이니 외출 시 따뜻한 옷차림을 하시기 바랍니다."

두툼한 옷차림으로 날씨 예보를 하는 기상캐스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방 안에서 느끼는 겨울 추위는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요 며칠 포근했던 터라 '추위'라는 말이 방안을 기웃거리다가 슬금슬금 나가 문밖으로 사라집니다. 더구나 며칠 전 입춘도 지났는걸요.

  잔뜩 준비한 밑반찬을 들고 1시간 이상 가려면 가벼운 옷차림이 좋습니다. 로 산 봄 코트를 걸치니 마음도 한결 가볍습니다.

문 밖을 나와 경솔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더 절실히 다가옵니다.
자꾸만 버스 대기 현황판만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30번 차고지 대기..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차고지 대기라는 글귀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른 차 번호 옆에는  '대기시간 5분, 전전, 버스 진입'으로 바꾸며  추위에 떨고 있는 승객들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달려오는데 뚫어져라 노려봐도 변하지 않는 글귀에 슬그머니 화가 나려고 합니다.

  대기실 의자에는 어르신 두 분이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듯 어르신들의 얼굴엔 인자한 미소까지 넘쳐납니다.
너무 추워 입술조차 얼어붙는데 어떻게 저리 따스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눈은 현황판을 노려보면서 어르신들의 대화에 슬그머니 귀를 가져가 봅니다.

"아이고 세상 좋아졌어. 어떻게 여기까지 따뜻하게 했을꼬."
"그러게. 난 처음엔 차가운 줄 알고 앉지도 않았지 모야. 여기에 있으면 버스가 늦게 와도 괜찮다니깐."
"에구 버스 왔네. 아쉽지만 타고 가자고…"

  행복해하시던 두 분의 어르신  떠난 자리. 새로 단장한 듯 시원해 보이는 장의자에 수원 청개구리 '수원이'가 마스크를 쓰고 있네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따뜻한 자리, 시민을 위한 수원시의 마음입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엉덩이만 살짝 걸쳐봤지요. 가뜩이나 추운데 찬데 앉으면 더 춥게 느껴지잖아요.

앉자마자  마음까지 꽁꽁 얼었던 몸이 사르르 풀립니다. 차가운 손을 엉덩이 밑에 넣으니 화가 났던 마음이 봄눈 녹듯 풀어져 방금 전 그 어르신들의 미소가 저절로 나옵니다.


30번 버스의 현황판이 바뀌었습니다.

 "전전, 전, 버스 진입"

칼바람 속에서 엉따를 즐기고 있는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30번 버스가 야속해집니다.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합니다. 어째 이렇게 내 마음이 간사한 걸까요.


하지만 이틀 후에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오늘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합니다. 그리고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오지랖을 떨어 봅니다.


"여기 의자 엉따예요. 잠깐이라도 몸 녹이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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